'유럽의 문제아', '유럽의 아픈 손가락'.
그리스가 만년 재정적자와 국가 부도 위기 등으로 얻었던 오명들이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은 짐 덩어리로 전락한 그리스에 탈퇴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국가 신용등급 전망에 청신호가 켜지면서 그리스가 이 같은 오명에서 드디어 탈피할 수 있게 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투자등급 구간 진입한 그리스 국가신용
국제신용평가기관 S&P글로벌이 최근 그리스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긍정적'으로 변경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리스가 오는 21일 총선 정국 이후에도 정치적 안정을 유지한다면 투자등급을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리스의 국가 신용등급은 현재 투기등급(speculative grade)으로 분류돼 있지만, BBB-로 상향 조정되면 투자적격등급(investment grade)에 편입될 것이란 전망이다.그리스의 주요 은행 유로뱅크의 포키온 카라비아스 최고경영자(CEO)는 "정부의 차입 비용뿐만 아니라 민간 은행과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에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투자등급으로의 회복은 유럽 금융 시스템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0여년 간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았다"며 "그들은 그리스 정부가 부채 더미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고 민간은행은 부실대출 규모를 줄일 수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결국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게 증명됐다"고 강조했다.
EU 통계청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그리스는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0.1%에 달하는 기초재정수지 흑자를 달성했다. 기초재정수지 비율은 GDP 대비 부채 상환 이자 비용을 제외한 재정수지 비율을 의미한다. 그리스 민간은행들의 대차대조표에서 부실채권으로 분류되는 대출의 비율은 2016년 50% 이상에 달했지만, 현재 7% 가까이로 줄어들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206%까지 치솟았던 GDP 대비 정부 부채 규모는 지난해 2012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인 171%로 감소했다.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부채 감소율이다. 부채의 실질 가치를 떨어뜨리는 높은 물가상승률 덕분에 올해도 그리스의 부채 규모는 계속 줄어들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와 함께 그리스의 GDP 증가율은 2021년과 지난해 각각 8.4%, 5.9%를 기록하며 팬데믹 이후 가장 강력한 회복세를 보였다. 리갈앤제너럴 투자운용사의 크리스 제퍼리 금리 전략 책임자는 "그리스의 명목 GDP는 지난 2년 동안 25% 이상 증가한 반면 명목 부채는 4% 늘어나는 데 그쳤다"고 분석했다. 제퍼리는 "올해 안에 그리스의 신용등급은 한 차례 더 상향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통 수반한 개혁, 빛 봤다
해운과 관광, 농업 등에 의존했던 그리스는 2008년 국제 금융위기 이후 주력 산업들이 몰락하자 과도한 정부 지출을 감당할 수 없어 재정난에 빠졌다. 2010년에 국제통화기금(IMF)과 EU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ECB)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그리스는 이듬해 2차 구제 금융을 받고도 난관을 돌파하지 못했다. 당시를 기점으로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발 재정 위기가 유럽에 퍼져나갔다. 그리스의 GDP는 과거 최정점 대비 25%로 곤두박질쳤다. 그리스 경제가 되살아난 데에는 제도 개혁과 해외 수요 증가, 임금 삭감 등이 빛을 발한 덕분이라는 평가다. 코로나19 이후 전자 결제를 도입한 상점들이 급증했는데, 이는 상점의 매출 증대뿐만 아니라 당국의 세금 추적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그리스 중앙은행의 수석 경제학자인 디미트리스 말리아로풀로스는 "어둠 속에 있던 민간 경제 활동이 드러나면서 세수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직접 투자도 그리스에 호재가 됐다. 그리스에 대한 외국인 직접 투자는 지난해 50% 늘어 2002년 관련 통계가 시작된 이후 최고치 증가율을 찍었다. 그리스 GDP의 20%를 차지하는 관광업도 작년 한해 반등에 성공해 팬데믹 이전 수준의 97%까지 회복했다. 그리스를 찾은 외국인들은 휴가만 즐긴 게 아니라 부동산 구매도 늘렸다. 지난해 해외 바이어를 대상으로 한 그리스 부동산 판매 규모는 20억유로에 달했다. 2007년 규모보다 4배 가까이 급증했다.
2021년 기준 그리스의 상품 수출 규모는 2010년도보다 90% 늘어났다. 이는 유럽 전체의 평균치인 42%에 비해 압도적인 성장세다. 말리아로풀로스는 "지난 10년간 그리스 경제를 끌어올린 효자 부문은 수출"이라면서도 "가장 큰 요인은 노골적인 임금 삭감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그 고통이 보상을 받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FT는 "EU에서 상대적 빈곤율이 가장 높은 그리스가 고통스러운 긴축을 감행한 결과 투자등급 회복이라는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리스 국민들이 임금 삭감 등으로 고통을 분담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최저임금은 12년 전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하다 최근에서야 월 910유로로 80유로 가량 인상됐다.
다만 신용평가사들의 향후 등급 판단은 그리스의 정치적 지형도에 명운이 달려있다. 중도 우파 성향의 집권 신민주당 지지율은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급진 좌파 야당인 시리자보다 5~6%포인트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차가 크지 않아 오는 7월 결선 투표를 치르고 나면 향후 연합정부 구성에 잡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