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무슨 투표를 한다는 거야? 남자들이 투표하고 오는 동안 여자들은 집에서 애나 잘 보면 되지.”
선진국이라는 스위스에서도 1990년까지는 이런 말이 일상적으로 오갔다. 스위스는 1991년이 돼서야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법으로 보장했다. 미국(1920년), 영국(1928년)은 물론 한국(1948년)보다도 훨씬 늦었다. 그만큼 스위스의 사회 분위기는 가부장적이고 남성 위주였다.
스위스 여성 예술가 하이디 부허(1926~1993·사진)는 이런 현실을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자신을 억압하던 것들을 말 그대로 ‘잡아 뜯어’ 버렸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하이디의 아시아 첫 회고전에서 만날 수 있는 너덜너덜한 누런 껍질들은 그가 자신을 억압했던 모든 것을 뜯어낸 흔적이다.
전시는 2층부터 시작하지만 하이디가 왜 이런 작품들을 만들었는지 이해하려면 3층을 먼저 둘러봐야 한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다. 2층에는 하이디의 대표작인 ‘껍질 작품’들이 있는 곳이지만 배경지식 없이 작품을 보면 생경하다.
하이디는 취리히 미술공예학교를 나왔다. 당시 유명 예술가인 요하네스 이튼(색채)과 막스 빌(형상)에게 배웠다. 스위스에서 여성이 이만한 고등교육을 받은 건 이례적이었다. 학업을 마친 뒤 하이디는 미국과 유럽 등지를 돌아다니며 패션 및 장식미술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3층 전시장에는 이때의 드로잉과 색채 연구, 패션 관련 습작 스케치가 나와 있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는 하이디가 결혼 전 사랑한 남성들을 그린 드로잉 작품들이 걸려 있다. 이 중에는 1957~1958년 그린 한국인의 얼굴도 있다. 당시 미국에 주재한 한국 외교관이다. 남성은 그림 한쪽에 직접 한자로 쓴 자신의 이름과 함께 하이디의 음역인 하이지(河耳知)를 적었다. 그 시절 이역만리에서 온 동양인을 편견 없이 사랑할 만큼 하이디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1960년 동료 예술가 카를 부허(1935~2015)와 결혼해 미국에서 가정을 이루면서 하이디의 작품세계는 ‘부드러운 조각’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부부는 스펀지 등으로 ‘입을 수 있는 조각’을 만들고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서 퍼포먼스를 펼쳤다. 전시장에서는 당시 퍼포먼스 영상인 ‘바디쉘’(1972)과 함께 작업을 재현한 작품들이 나와 있다. 영상에서는 단란한 가족의 행복감이 그대로 묻어난다. 하지만 하이디가 이런 행복에 안주했다면 그의 명성이 이렇게 커질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이해한 뒤 2층으로 내려오면 너덜너덜한 구조물들이 달리 보인다. 예술가로 홀로 선 하이디는 자신을 억압하던 옷과 공간에 액상 라텍스를 바르고, 이 라텍스가 굳어지면 직접 뜯어내는 ‘스키닝(skinning)’ 기법을 고안했다.
‘여성들은 정신병에 걸리기 쉬운 존재’라는 잘못된 편견을 비판하기 위해 정신병원 진찰실을 떠낸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1988), 아버지의 서재를 떠낸 ‘신사들의 서재’(1977)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이디의 아들인 인디고 부허는 “사회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어머니의 시도였다”고 설명했다.
하이디는 생전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세간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언젠가는 세상이 자신의 작업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하이디의 작품세계는 2004년 스위스 취리히 미그로스현대미술관 회고전을 시작으로 본격 재조명받기 시작해 2013년 파리 스위스문화원과 2017년 베네치아비엔날레 본 전시, 2021년 독일 뮌헨 헤우스데어쿤스트의 대규모 회고전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도 그의 작품을 앞다퉈 사들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잠자리의 욕망’은 전시 직후 미국 뉴욕으로 날아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될 예정이다. 전시는 6월 25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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