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의 초대형선 신조에 대해선 내부적 비판도 상당했지만 얼라이언스의 협력 계약 당사자인 2M으로부터의 저항은 더욱 거셌다. 2M과의 계약은 2020년 3월 종료되므로 그 이후 투입되는 현대상선의 초대형선에 대해 2M 측에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협력 기간 내내 2M은 초대형선 건조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현대상선이 초대형선 투입을 고수한다면 2M과의 협력 연장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금도 MSC 창업자인 잔루이지 아폰테(Gianluigi Aponte) 회장과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2018년 하반기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화주와의 접촉 빈도를 높이고 있었을 때였다. 시간을 쪼개 덴마크의 머스크 경영진과 스위스에 있는 MSC 본사를 방문했다. 2020년 이후 2M과의 협력을 논의하고 현대상선이 도입할 초대형선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초 면담 상대는 아들인 디아고 아폰테(Diago Aponte) 사장이었는데 예상치 않게 잔루이지 아폰테 회장이 나타나 현대상선의 초대형선 건조에 대해 상당히 강경한 어조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이미 포화 상태에 있는 시장에 초대형선을 투입하는 것은 시장을 악화시키는 잘못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재무 상태가 부실한 현대상선의 몸집을 2배로 불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논리였다.
나는 2000년대 중반 어느 누구도 협력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의 존재감 없던 MSC가 어떻게 급성장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MSC는 2005~2007년 50만TEU에서 100만TEU로 급격히 선복을 키웠던 전력이 있었다. 2010년대 초부터는 초대형선 건조로 몸을 더욱 불리며 유가 급등으로 인한 감속운항(Slow Steaming)의 최대 수혜자가 돼 어느덧 머스크의 얼라이언스 파트너가 돼 있었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현대상선의 성장 모델과 비슷한 MSC의 2005~2007년 급성장을 언급하면서 현대상선도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건조가가 낮고 스크러버를 장착한 경쟁력 있는 선박을 2M 협력 하에 두는 것은 2M을 위해 바람직하다고도 했다. 머스크가 더이상 초대형선을 건조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에서 현대상선의 초대형선 참여는 대안으로 이상적일 것이라 설득했다. 아울러 대주주가 바뀐 현대상선은 재무 리스크가 해소됐다고 강조했다.
아폰테 회장과의 면담은 이처럼 서로의 입장 차를 확인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MSC는 자신들의 성장 모델을 현대상선이 벤치마킹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다리 걷어차기’ 식 논리를 폈다. 한 마디로 현대상선을 장기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속내를 파악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면담 후 아폰테 회장은 최신형 럭셔리카를 손수 운전하며 오찬을 대접하는 등 후의를 베풀었지만 초대형선을 건조하는 현대상선에게 협조할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머스크의 태도였다. 코펜하겐 본사를 방문해 MSC에게 했던 것처럼 논리로 우리가 건조하는 초대형선의 가치를 설명하며 ‘2M+HMM 협력’에 시너지를 낼 것임을 강조했다. 당시 크게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았던 머스크의 소렌 스코우(Soren Skow) 사장은 2018년 11월께 신조 명명식 참석차 방한했을 때 부산으로 찾아간 내게 초대형선 신조와 관련해 정색하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 같은 반응을 이미 예상했던 터라 2M과의 협력 상황이 정리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2M은 한진 사태를 그들이 기대했던 글로벌 해운계의 집중화 과정의 일차적 마무리로 봤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현대상선을 2M에 흡수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협력하기로 한 3년간 두고 보기로 했는데 예상외로 현대상선이 빠른 속도로 회복하며 초대형선 건조 가능성을 내비쳤고, 조선소와 본 계약을 체결했기에 이르렀다는 뉴스를 듣고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대내외적 반대 압력이 거셌지만 현대상선의 재기 의지는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간 공들여 추진해온 타 얼라이언스와의 협의를 매듭짓는 수순과 함께 영업력을 끌어올려 큰 배를 채우는 일만 남은 것이다.
선박 건조를 위한 금융은 대주주인 산업은행이 도와준다 해도 선박 건조 사양 결정과 영업력 증대, 안전 운항은 현대상선의 몫이었다. 우선 선사 입장에서 투입 항로를 결정하고 이에 따른 건조 척수, 선형, 엔진 타입 등을 신속하게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건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세계적 조선 3사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국적선사가 부채비율 때문에 사실상 신규 선박 투자에 발이 묶인 사이 머스크, MSC 등이 조선 3사가 제공하는 좋은 조건의 금융과 기술력에 힘입어 연비 좋은 초대형선을 짓고 그 경쟁력으로 국적선사를 공격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면 조선 3사의 문제라기보다는 해운산업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아니한 획일적 금융 제도의 문제였디. 또한 미리 시대를 읽고 저속 초대형선을 선도하지 못한 국적 해운선사 소속 얼라이언스의 집단지성 측면 창의성 부족 문제였다.
20척 발주 선단의 구성은 극동-유럽 항로에 투입할 초대형선 2만4000TEU급 컨테이너 선박 12척과 아시아-미주동안 항로에 투입할 1만5000TEU급 8척으로 결정했다. 조선사에선 이미 디자인해 건조한 경험이 있는 선형들이었기 때문에 빠르게 진척될 수 있었다.
나는 엔지니어 출신은 아니었으나 2008년 말 컨테이너본부장으로 있을 때 현대상선 계열회사로 선박 관리를 업으로 하는 해영선박㈜ 대표이사로 발령받아 2년간 부산에서 근무한 적 있었다. 좌천성 인사를 통보받은 당시에는 해영선박에서의 경험이 이후 현대상선 사장으로서, 특히 초대형선 발주 시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 [대한민국 해운강국의 길 - 유창근 전 HMM 대표 육필 회고] 7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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