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류의 미래는 두 국가에 달려 있다."
세계적인 외교 석학인 헨리 키신저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기술 및 경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양국의 갈등이 심화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말 8시간에 걸쳐 키신저와 나눈 대화를 17일(현지시간) 공개했다.
20세기 현대사의 산증인으로 알려진 키신저는 1971년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하며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이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닉슨의 방중 이후 미·중 수교의 물꼬가 터졌다. 1979년 국교를 수립하는 데 발판이 된 것이다. 1973년에 키신저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정치적으로 양보할 여지가 적다"며 "힘의 균형이 깨지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다"라고 짚었다.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선 중국의 속내를 알아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중국에 우호적인 학자라고 평가받지만 키신저는 냉철하게 중국을 분석했다. 대다수 중국 정치인들은 미국이 하락세에 놓였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역사의 흐름에 따라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 것이란 설명이다.
중국 정계가 공유하고 있는 신념은 분노로 이어진다. 키신저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서방국가가 제안한 질서가 사실상 미국이 주창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기후 변화 대응 등 서방 국가가 중국에 요구하는 책임과 이에 따른 보상이 불공정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중국 지도부 입장에선 신흥 강대국으로서 당연히 특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미국이 결코 중국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을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중국 정치인들의 시각이다.
키신저는 이 감정을 분석할 때 오독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중국이 판도를 뒤엎으려 세계를 지배하고 싶어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이는 오해라는 주장이다. 키신저는 "중국은 초강대국으로 도약하고 싶을 뿐 지배하는 걸 원치 않는다"며 "지배는 중국이 세계를 보는 관점에서 벗어난 발상이다"라고 강조했다.
키신저가 이런 주장을 내놓은 배경엔 중국 사상이 있다. 사실상 중국이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국가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중국의 근간에는 유교주의가 있고, 유교적 이상을 이룩하기 위해선 세계적인 권위를 챙기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과 기술 모두 우위에 있다면 중국의 문화나 마르크스주의를 타국에 강요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미국이 중국에 대응하는 방식도 이런 인식을 반영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중국과 미국의 전략적 역할이 양립 가능한 지를 평가하고 영구적인 대화 창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중 양국이 대만에 관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유지하되, 미국은 병력 배치에 신중을 기하고 대만 독립을 지원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이 대화해야 할 중요한 분야 중 하나로 인공지능(AI)을 꼽았다.
AI를 지금에 와서 폐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양국이 핵 군축처럼 AI 군사능력에 대한 억지력을 증강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기술의 영향과 관련해 교류를 시작하고 군축을 위한 걸음마를 떼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해선 실용주의를 강조했다. 미국이 외국 정치에 개입할 때마다 세계를 자유·민주·자본주의 사회로 만들려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도덕적 원칙이 이익에 너무 자주 앞서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지적이다.
키신저는 인도의 예시를 들며 다자간 구조에 메이기보다는 현안별로 맞춤형 동맹을 맺으라고 제언했다. 그는 "유럽, 중국, 인도가 합류할 수 있는 원칙에 기반을 둔 세계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그 실용성을 본다면 끝이 좋을 수도 있고, 최소한 재앙 없이 끝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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