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의 광활한 협연도, 피아노의 명료한 연주도 없이 단 하나의 악기로 작품 세계를 온전히 표현해내야 하는 무반주(無伴奏)곡. 이 장르에서는 일단 한번 시작하면 연주자의 치부가 숨을 공간이란 없다.
아주 미세한 기교의 실수부터 어색한 표현, 불분명한 악상 변화까지 모든 빈틈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의 연주자들은 웬만한 실력과 확신 없이는 무반주곡을 무대에 올리는 일을 자처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공연 전체를 무반주곡 레퍼토리로 채웠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36)이 지난 16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에서 무반주곡 향연을 펼쳤다. 다섯 살 때 독일 함부르크심포니 협연으로 세계 무대에 데뷔한 그는 2010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국제바이올린콩쿠르에서 우승한 실력파 연주자.
브레멘필하모닉, 도이치캄머필하모닉, 애틀랜타심포니 등 해외 유수 악단과 호흡하며 국제 무대에서 활약 중인 그가 리사이틀을 연다는 소식에 평일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은 인파로 북적였다.
오후 8시. 당찬 발걸음으로 등장한 클라라 주미 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이올린을 어깨에 올렸다. 1부는 바이올린의 온갖 기교와 표현이 녹아있어 ‘바이올린의 성서’로 불리는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로 채워졌다.
첫 곡은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1번. 그는 시작부터 특유의 깔끔한 음색과 섬세한 보잉(활 긋기)으로 성스러우면서도 서정적인 작품의 매력을 드러냈다. 현에 가하는 장력, 보잉과 비브라토 속도 등을 예민하게 조절하면서 자칫하면 단조롭게 들릴 수 있는 선율에 풍부한 색채를 덧입혀 소리를 냈다. 그러자 바흐 특유의 정제된 아름다움과 입체감이 살아났다.
다음 곡은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2번이었다. 그는 명징한 리듬 표현과 견고한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춤곡에 담긴 생동감을 표현해냈다. 활을 악기에 완전히 밀착시켜 무게감 있는 음색으로 주제 선율을 드러내다가도 금세 힘을 빼고 가벼운 터치로 바흐의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풀어내는 능력은 일품이었다.
바흐 음악의 정수로 꼽히는 샤콘에서는 애절한 음색과 장대한 활 움직임으로 응축된 에너지를 증폭시키면서 극적인 악상 변화를 이끌었다. 휘몰아치는 격정의 감정이 생생히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2부에서는 흠 없는 기교와 묘한 음색으로 이자이 특유의 열정적인 악상을 펼쳐냈다.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 3번 발라드에서는 음과 음 사이에 공간을 두고 만들어내는 음산한 색채와 저음에서 고음으로 솟구치면서 펼쳐내는 강렬한 악상이 대비를 이루면서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했다. 울림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활에 힘을 가해 거친 질감을 표현하는 연주에서는 노련함이 엿보였다.
소나타 5번에서는 왼손 피치카토 등 낯선 기교까지 선율의 흐름에서 움직이도록 정교하게 처리하면서 서늘한 작품의 색채를 온전히 드러냈다. 빠르게 쏟아지는 음표 속에서도 중요한 선율은 귀신같이 짚어냈다. 소나타 6번에서는 3도·8도 스케일, 더블스톱(동시에 두 현을 긋는 것) 등 고난도 기교를 소화하면서도 유연하게 활을 컨트롤해 변화무쌍한 작품의 맛을 제대로 살려냈다.
마지막 곡은 밀슈타인의 파가니니아나였다. 파가니니의 ‘24개 카프리스’ 속 주요 선율을 변주해 만든 작품이다. 화려한 음색과 흐트러짐 없는 리듬 표현, 유려한 기교 처리는 작품 특유의 역동성을 살려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온·오프 스위치를 번갈아 누르듯 순식간에 소리의 강약과 표현의 완급에 변화를 주는 연주는 풍부한 정감을 드러냈고, 폭발적인 표현력과 고난도 기교로 질주하는 그의 연주력은 청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이날 클라라 주미 강의 연주는 바이올린 한 대만으로도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짙은 감동과 바흐, 이자이, 밀슈타인의 심오한 음악 세계를 장대히 펼쳐낼 수 있다고 외치는 언어였다. 그의 다음 연주가 기다려졌다. 연주자에게 그의 음악을 또 듣고 싶다는 말보다 더한 칭찬이 있을까.
김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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