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서울이 아파트로만 뒤덮여 있고, 오래된 건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반은 맞는 말이다. 외세의 강점과 전쟁을 거치며 서울의 수많은 오래된 건물들은 철저히 파괴됐다. 압축성장기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서울이 600년이 넘는 기간 수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도시라는 점. 고도(古都)의 흔적은 여전히 서울 도심 곳곳에서 묻어난다. 세계 각국의 관광객과 평생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도시인에게 도심 속 고택은 유리 커튼월의 고층 빌딩과 넓은 도로 사이 오아시스가 됐다.
지금은 고희동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이곳은 북촌(北村)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북쪽 마을’이라는 이 단순한 이름은 오로지 일제강점기 청계천 이남의 일본인 거주 구역 ‘남촌(南村)’과의 구분을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북촌과 남촌의 경계는 일본인 인구가 늘며 점차 희미해져 갔다. 조선인들이 점차 도성 밖으로 밀려나자 훗날 ‘한국 최초의 디벨로퍼’란 별명이 붙은 정세권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정세권은 조선인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가회동, 계동, 삼청동 일대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했다. 기존엔 양반들이 거주하던 넓은 택지를 쪼개는 대신 여러 채의 작은 한옥을 대량 공급했다. 규모만 컸던 게 아니다. 화장실은 한옥 안으로 들어갔고, 부엌은 입식 구조로 바뀌었다. 전통 한옥에 혁신적인 20세기의 색깔이 입혀진 일종의 ‘뉴타운’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20세기 뉴타운’ 북촌엔 21세기의 색깔이 입혀지고 있다. 화장품 브랜드 ‘설화수’는 1930년대 지어진 한옥과 1960년대 지어진 양옥을 연결해 자사의 플래그십 스토어 ‘북촌 설화수의 집’으로 탈바꿈했다. 각기 전혀 다른 양식으로 지어졌고, 전혀 다른 주인들이 살고 있던 두 고택은 그 사이를 가로막던 축대가 해체되고 중정이 생기자 유기적으로 하나가 됐다.
골목 뒤편엔 청기와가 얹어진 넓은 한옥이 숨어 있다. 1900년대 초기에 건설된 이 대형 고택은 현재 고급 한옥 호텔 ‘노스텔지어블루재’로 재탄생했다. 20세기 뉴타운 특유의 높은 담장에 속살을 쉽게 보여주진 않지만 지난 3월엔 한 친환경 화장품 브랜드의 팝업스토어 공간이 되기도 했다.
도심 속 넓은 중정이 있는 한 100년이 넘은 고택 대문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포도청이었다가 구한말 요정(料亭)이 되기도 했고, 광복 후엔 한정식집이기도 했다. 이젠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된 ‘어니언 안국점’에서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사랑채에 들어가 양반다리를 한 채 커피를 마신다. 테이블 대신엔 소반이 있다. 대청마루에 앉아 ‘ㅁ자’ 하늘을 바라보거나 고무신을 신고 중정을 거닐 수도 있다.
도성 밖 만리재 초입엔 백 년간 이 자리를 지킨 번듯한 적산가옥이 있다. 1932년 일본인 인쇄소 사장의 사택으로 지어진 이 집은 광복 후 미군정 사단장의 사택으로 사용됐다. 6·25전쟁이 끝난 뒤엔 한 한국 정치인 가족의 보금자리가 됐던 이곳은 ‘더 하우스 1932’라는 카페로 재탄생했다. 내부 곳곳에 있는 목조 기둥엔 이 집을 거쳐간 수많은 가족의 발자취가 나이테처럼 녹아 있다.
골목에서 내려오면 1910년 지어진 석조 건물이 있다. 병원, 우체국, 인쇄소로 사용된 이 건물은 현재는 ‘베리키친’이란 이름의 퓨전음식점으로 다시 태어났다. 엄밀히 말하면 고택(古宅)은 아니지만 100년의 세월 동안 이 공간을 다른 목적으로 지나쳐간 수많은 사람의 말소리와 발자국이 묻어난다. 길 건너 서계동엔 70년 된 고택이 위스키바 ‘청파랑’으로 재탄생했다. 한옥의 외관만 살린 게 아니다. 한옥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바와 벽면엔 전돌이 오브제로 사용됐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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