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연인과 헤어지자 그를 본뜬 실물 크기 인형을 주문 제작한다. 그러고는 인형에 맞춤 제작한 옷을 입히더니, 공연장이나 카페 등 공공장소에 데리고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남자는 인형의 목을 베고 레드와인을 그 위에 붓는다.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런 기행은 100년 전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회화 거장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가 실제로 벌인 일이다.
알마가 일곱 살 연하인 코코슈카를 처음 만난 것은 1912년. 첫 남편인 구스타프 말러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였다. 코코슈카는 당시 기괴하면서도 독창적인 화풍으로 빈 예술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클림트가 코코슈카를 “젊은 세대 중 가장 위대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천재 예술가와 마성의 연인은 보자마자 서로에게 끌렸다. 둘은 열렬히 사랑했다. 문제는 코코슈카가 연인에게 집착하는 성격이었고, 알마의 바람기가 이런 집착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둘의 관계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12년 알마가 코코슈카의 아이를 임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코코슈카는 이참에 결혼하자고 애원했지만 알마는 낙태를 택했다. 자포자기한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그리고 전투에서 심각한 상처를 입어 생사의 기로를 헤맨다.
하지만 완성된 인형은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코코슈카는 “곰 가죽으로 만든 깔개 같다”고 했다. 인형을 실제 연인처럼 대했지만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피할 수는 없었다. 1920년대 초 마침내 정신을 차린 코코슈카는 인형을 파괴한 뒤 “그 덕분에 내 열정은 완전히 치료됐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광적으로 사랑했지만, 의외로 둘은 헤어진 뒤 별 탈 없이 잘 살았다. 알마는 두 번째 남편과 이혼한 뒤 세 번째 결혼을 했고, 죽을 때까지 유명 인사로 살았다. 코코슈카도 좋은 짝을 찾아 결혼한 뒤 말년까지 활발히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둘의 편지가 수십 년간 끊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용만 보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갈 것만 같다. 1949년 70세 생일 때 코코슈카가 보낸 편지가 대표적이다. “사랑하는 나의 알마!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오.” 하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재회하는 일은 없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기가 넘쳤던 이들의 사랑은 미술사에 ‘바람의 신부’(1914·사진)라는 흔적으로 남았다. 그림 속 화가는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연인인 알마 말러를 안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인간 내면에 휘몰아치는 사랑과 열정, 광기가 응축된 걸작이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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