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21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했다. 이 위령비는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 투하로 목숨을 잃은 한국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시설로, 한·일 양국 정상이 함께 참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대통령은 지금까지 위령비를 참배한 적이 없었다. 일본에선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유명한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가 1999년 참배한 바 있다.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기시다 총리와 기시다 유코 여사는 이날 오전 7시35분께 위령비를 찾아 일렬로 서서 백합 꽃다발을 헌화하고 허리를 숙여 약 10초간 묵념했다. 윤 대통령은 이후에 한 차례 더 묵례했고, 원폭 피해자들에게도 인사했다. 한국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의 박남주 전 위원장, 권준오 현 위원장 등 10명의 원폭 피해자가 뒤에 앉아 참배를 지켜봤다. 박 전 위원장은 피폭 당사자, 권 위원장은 피폭자 2세다.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은 “두 정상이 한·일 관계의 가슴 아픈 과거를 직시하고 치유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북아 더 나아가 국제사회에서의 핵 위협에 두 정상, 두 나라가 동맹국인 미국과 함께 대응하겠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이후 약 35분간 양자 정상회담을 했다. 한·일 정상회담은 올 3월 윤 대통령의 방일, 이달 초 기시다 총리의 방한에 이어 두 달여 동안 세 차례 이뤄졌다. 기시다 총리는 이에 대해 “한·일 관계의 진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의 리더십으로 주요 7개국(G7) 회의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고 있음을 축하했다.
윤 대통령은 첫머리 발언에서 “우리가 오늘 함께 참배한 것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해 추모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평화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총리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기시다 총리도 위령비 참배에 대해 “한·일 관계에서도,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두 정상은 회담에서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이 상호 연대와 협력을 통해 다양한 글로벌 아젠다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했다고 이 대변인이 전했다.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이 고조되는 엄중한 지역 정세하에서 한·미·일 간 긴밀한 공조를 더욱 굳건히 해나가야 한다는 데도 의견을 같이했다. 두 정상은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정상 간 셔틀외교를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
한편 김건희 여사와 기시다 유코 여사는 이날 정상회의 배우자 프로그램이 끝난 뒤 히로시마 시내 한 식당에서 오코노미야키를 맛보며 별도의 친교 오찬을 했다. 기시다 여사는 김 여사가 지난 7일 한남동 관저 만찬에서 히로시마 오코노미야키에 대해 기대감을 표한 것을 기억하고 이날 오찬을 직접 마련했다. 김 여사는 “여사님과 제가 자주 만나고 마음을 나눈 만큼 양국 국민들도 더욱 가깝게 교류하기를 바란다”고 했고, 기시다 여사도 “앞으로 자주 왕래하자”고 화답했다.
히로시마=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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