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끗한 반백의 머리에서 연륜이 느껴졌다. 하지만 두 눈동자는 여전히 날카로왔고 검게 그을린 피부, 다부진 몸은 그 어떤 청년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탱크' 최경주(53)는 21일 제주 핀크스GC에서 막 내린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SK텔레콤 오픈의 또다른 주인공이었다. 대회 초반 제주를 덮친 악천후에 하루 25홀을 소화해야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커트 통과에 성공하며 이 대회 최다 커트 통과(20회) 신기록을 세우더니 대회 마지막날에는 타수를 잃지 않고 공동 19위로 마쳤다. 그가 만들어내는 한국 골프의 전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증명해낸 것이다.
최경주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 진출해 8승을 달성했다. 지금은 시니어 투어인 PGA 챔피언스 투어와 PGA투어를 병행하고 있다.
한국 골프에서 전인미답의 영역을 개척해온 그이지만, 53세의 나이로 4라운드를 모두 걸어서 한창 체력이 좋은 20~30대 후배들과 경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1, 2라운드에서는 코리안투어 대표 장타자들과 한 조에 편성되는 '불운'(?)까지 겹쳤다 김비오(33)는 현재 코리안투어에서 비거리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는 대표 장타자다. 정찬민(24)은 지난달 GS칼텍스매경오픈에서 350야드가 넘는 장타를 날리며 골프팬들에게 '한국의 욘 람'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지는 않았냐고 묻자 2004년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2004년이던가, 더스틴 존슨, 개리 우드랜드와 같은 조에서 경기했다. 두 선수 모두 나보다 100야드 이상을 더 보냈다. 하지만 그날 제일 스코어가 좋았던 선수는 나였다. 그들이 두번째 샷으로 그들이 샌드웨지를 잡을 때 나는 5번 아이언을 잡아야했다. 그럼 뭐 어떤가. 그린 주변에서는 차이가 없다. 한 두 클럽 크게 잡는거에 위축될 필요 없다. 나의 무기를 갈고 닦으면 되는거다."
이번 대회 1라운드 1번홀(파4)에서는 최경주의 이같은 플레이가 한번에 드러났다. 오른쪽으로 휜 385야드 길이의 파4홀에서 김비오, 정찬민은 우드를 잡고 287야드, 274야드를 보냈다. 반면 드라이버를 잡은 최경주는 253야드를 보냈다. 티샷부터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끄떡없었다.
이 홀에서 최경주의 티샷은 벙커로 들어갔다. 미스인가 싶었지만, 고도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두 후배들이 우드로 페어웨이를 노린 반면, 최경주는 다소 위험을 무릅쓰고 최단거리를 택했다. 벙커에 빠졌지만, 그는 PGA투어에서도 빛을 발했던 '벙커의 신'이었다. 두번째 샷은 핀 2m 옆에 붙었고 최경주는 버디를 잡아냈다. 그의 노련미에 압도된 탓인지, 최경주가 1언더파로 2라운드를 마친 반면 두 후배들은 오버파로 크게 밀렸다.
이 대회 최경주의 평균 드라이브 거리는 261야드였다. 전성기에 비해서는 크게 줄어들었고, 5년전에 비해서도 10야드 이상 줄었다. 하지만 페어웨이 안착률 76.79%. 그린적중률 76.39%로 정교함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경주는 최다 커트 통과에 이어 최종 19위로 대회를 마감하며 골프팬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최경주에게 체력관리의 비법을 물어봤다. 그는 "비밀인디"라며 씨익 웃은 뒤 "매일 스쿼트 100개, 푸시업 100개를 하고 스트레칭도 30분씩 반드시 한다"고 귀띔했다. 4일 전 라운드를 걸어서 소화하면서도 여전히 현역다운 플레이를 선보인 핵심으로 그는 골반을 꼽았다. "챔피언스 투어에서는 카트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골반이 굳어서 18홀을 걸어서 소화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는 설명이다.
이제 최경주는 미국으로 돌아가 챔피언스투어 PGA 챔피언십, 메모리얼 토너먼트, 위스컨신 대회 등으로 다시 한번 도전에 나선다. 플레이어스 시니어 대회는 그가 우승을 목표로 벼르고 있는 무대다. 우승자는 다음해 '제5의 메이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경주가 만들어내는 전설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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