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가 고정된 조각이 움직일 수 있을까. 일반적으론 불가능한 얘기다. ‘현대미술의 거장’ 알렉산더 칼더가 조각에 움직임의 개념을 더한 ‘모빌’을 창시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각이 움직이는 건 아니다. 가느다란 철사나 실에 조각을 매달아 공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든 거니까.
부산 망미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영국 팝아트의 거장’ 줄리언 오피의 개인전에선 이런 불가능한 일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사람 키보다 큰 조각상이 자유롭게 춤을 추고, 비둘기 모양 조각들이 바닥을 쫀다. 바로 오피가 선보인 ‘가상현실(VR)’ 작품이다.
VR 고글을 쓴 관람객은 2차원 평면에 갇힌 회화가 3차원 세상으로 튀어나오고, 고정된 형태였던 조각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작가 스스로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도전적이고 색다른 작품들이다.
그에게 걷는다는 건 ‘살아있음을 느끼는 행위’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동이지만, 저마다의 보폭과 걸음걸이로 걷는 것이야말로 ‘나라는 팔레트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걷기’를 ‘춤추기’로 진화시켰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벽면엔 경쾌한 음악과 함께 평평한 LED 스크린 속 사람들이 춤을 춘다. 10년 전 유행한 ‘셔플 댄스’다. 오피는 “코로나19 기간 틱톡과 유튜브를 통해 셔플 댄스를 보게 됐다”며 “이 움직임을 본 순간 내가 작품에 가져오고 싶어 했던 생동감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댄서인 딸과 함께 셔플 댄스를 작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단순하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셔플 댄스의 움직임을 총 5개로 구분했다. 딸과 다른 댄서 세 명에게 실제로 그 춤을 추도록 하고, 동작 하나하나를 오피 특유의 굵고 단순한 윤곽선으로 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십 장의 드로잉을 이어 붙여 영상처럼 제작했다.
LED 속 사람들은 저마다 팔다리의 위치와 움직이는 속도 등이 조금씩 다르다. 실제 사람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오피는 춤을 추는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해 대형 알루미늄 회화로도 만들었다. 실감 나는 움직임 덕분에 관람객은 작품을 보는 순간 함께 몸을 흔들게 된다.
본 전시장에서 봤던 춤추는 사람들은 그중 하나다. LED 화면과 알루미늄판 속에 갇혀 있던 2차원의 춤추는 사람들은 관람객 옆에서 살아나 경쾌하게 몸을 흔든다. 춤추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전시장 곳곳에 놓여 있는 사람 모양 조각이 VR 부스 안에서 손을 흔드는가 하면, 비둘기 조각이 발밑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런던 구시가지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건물이 전시장 안에 들어서기도 한다.
왜 오피는 가상현실 속에 작품을 만들었을까. 그는 “기술 발전에 따라 사람들이 이미지를 인식하는 방식도 바뀐다”고 설명한다. LED 스크린을 통해 이미지를 바라보던 시대에서 어느덧 실제 현실과 VR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작품을 통해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은 결코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는다. 석천홀 입구에 있는 러닝머신 작품이 그렇다. 관람객은 실제 러닝머신을 걸으면서 오피의 작품 일부분이 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여러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이미지를 인식하지만, 실제 이 땅에서 발붙이고 걸어 다니는 행위 역시 중요하다는 오피의 메시지인 셈이다. 전시는 오는 7월 2일까지.
부산=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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