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을 통해 민간투자가 늘어나도록 물꼬를 터줘야 합니다. 기업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는 캐치프레이즈가 필요합니다.” (권오규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경제부총리·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해 지난 수십년간 국내 경제정책을 이끌어 온 역대 경제관료들은 한국 경제가 직면한 최대 위기로 고령화와 저출산 등에 따른 성장 잠재력 저하를 꼽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노동·연금·교육 등 3대 부문 개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민간 투자를 늘리기 위한 정부의 규제개혁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오는 25일 개최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6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최근 기재부 유튜브에 93분짜리 인터뷰 영상을 공개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총 31명이다. 역대 경제부총리 중 강경식·전윤철·진념·권오규·박재완·현오석·최경환·유일호·홍남기 전 부총리 등 9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이동호 전 내무부 장관, 사공일·박재윤 재무부 장관,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김성진 해양수산부 장관, 장태평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 윤대희 국무조정실장, 고승범 금융위원장, 김인호·한이헌·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 안병엽 정보통신부 장관, 정재룡·오종남 통계청장, 이영탁 국무조정실장, 육동한 국무총리실 차장, 현정택 정책조정수석, 조원동 경제수석 등 19명의 전직 관료도 인터뷰에 응했다.
이들은 과거 경제기획원(1961년 신설)과 재정경제원(1994년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통합), 재정경제부(1998년 개편)에 이어 현 기획재정부(2008년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 통합) 등에서 경제정책을 총괄했던 관료들이다. 김기환·송희연·김중수 전 KDI 역대 원장 3명도 인터뷰에 참여했다.
김영삼·이명박·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한 관료들도 두루 포함됐다. ‘한국 경제의 오늘과 내일’을 주제로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부총리를 비롯한 역대 경제관료들을 두루 섭외했다는 것이 기재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31명의 93분짜리 인터뷰엔 한국 경제가 처한 현실에 대한 경제 원로들의 가감 없는 진단이 고스란히 담겼다. 공무원 조직과 관료사회에 대한 날 선 비판도 제기됐다. 오랜 경험과 함께 그간의 경제정책 추진 과정에서 빚은 시행착오 등에서 얻은 통찰을 앞세운 각종 해법도 제시했다.
진 전 부총리는 “노동·연금·교육개혁은 성장 잠재력을 확보하기 위해 당연히 가야 할 수순”이라면서도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제대로 국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정책은 실패한다”고 밝혔다. 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선 이해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딜리버리’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재무부 차관과 산업은행 총재 등을 지낸 이동호 전 내무부 장관도 “노동·연금·교육 등 3대 부문의 개혁이 이뤄져야 선진국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혁에는 항상 저항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정치적 생명을 걸고 연금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은 “지금도 많이 떨어져 있는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중장기적 차원에서 키우기 위해선 노동개혁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사 전 장관은 역대 최장수 경제수석(1983~1987년)과 한국무역협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여성과 일할 능력이 충분한 60세 이상의 노령인구를 노동시장에 참여시키기 위해선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필요하다”며 “노동개혁은 이들을 비롯한 근로자들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노무현 정부 때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권오규 전 부총리는 “민간기업이 앞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분야를 키워나가기 위해선 정부가 우선 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이 시급하다는 것이 권 전 부총리의 설명이다. 그는 “민간이 투자를 늘리고 성장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정부가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을 통해 기업들이 투자를 더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기획원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후 김대중 정부에서 재정경제비서관과 통계청장을 지낸 오종남 전 통계청장은 노동개혁이 근로자를 힘들게 하는 개혁으로 잘못 인식돼 있다고 했다. 그는 “국내 노동시장에선 대기업 정규직이면서 고임금을 받는 근로자만 노동조합에 가입돼 있다”며 “노동조합원이 아니어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들과 고임금 조합원 간의 임금 격차를 줄이는 것이 곧 노동개혁”이라고 밝혔다. 노동개혁이 마치 근로자들을 힘들게 하고, 사용자는 편하게 하는 개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오 전 청장의 설명이다.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하다가 김대중 정부 때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안병엽 전 장관은 “근본적으로 인구 구조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오는 연금 적자는 불가피하다”면서도 “향후 5~10년의 일시적인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금개혁은 당연히 손을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구가 당분간 정상적인 궤도에 있을 때 적자가 발생하는 것은 고쳐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늘리는 정책뿐 아니라 이민도 대폭 활성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윤 전 실장은 “유럽에선 외국인 근로자에게 취업비자를 내줄 때 가족들과 함께 입국할 수 있도록 해 준다”며 “국내서도 경제활동을 늘릴 뿐 아니라 소비도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이민 정책을 폭넓게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후 김영삼 정부 때 통계청장을 지낸 정재룡 전 청장은 유럽 선진국들의 사례를 들며 재정지원을 통한 출산율을 높이는 정책은 100%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년) 당시 가족계획 사업을 담당했던 정 전 청장은 “1970~1980년대 때 유럽 선진국의 합계출산율이 추락했을 당시 재정지원을 통해 출산율을 해결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선 여성들의 가사와 육아 부담을 덜어줘 노동시장에 진출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려면 우선 정부 내각부터 여성 장관들이 대거 선발해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경제부총리를 지낸 홍남기 전 부총리는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드는 등 인구 구조 변화는 한국 경제에 커다란 장애물로 다가오고 있다”며 “체계적이며 선제적으로 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후 KDI 원장을 거쳐 박근혜 정부 때 대통령실 정책조정수석을 지낸 현정택 전 수석은 “서로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미·중 공급망 분리에 현실적으로 적응하는 방법은 미국과 중국의 생산 체제를 어느 정도 유지하며 조화롭게 나아가는 것”이라며 “미국과 협조를 유지하고 중국과도 경제 관계를 활용해 유연하게 충격을 줄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일본도 중국과 싸우는 것 같지만 우리보다 더 의미 있는 관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며 “이들의 정치를 상당히 참고해 중국과 공유와 협조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정부 때 부총리를 지낸 현오석 전 부총리는 “기본적으로는 민주주의 등 가치동맹에 뿌리를 두되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있다”고 말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잘 이끌어 나가야 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설명이다.
경제기획원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후 노무현 정부에서 중소기업청장과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김성진 전 장관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20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종료된 것은 그만큼 정부 주도의 경제계획이 통하지 않는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정부 역할은 여전히 계속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전 장관은 “시장과 민간의 성장동력을 촉진할 수 있는 방향에 역점을 두되, 당장의 이익이 나지 않기 때문에 민간에서 소홀히 할 수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중장기적인 투자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정경제부 차관보를 지낸 후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수석을 역임한 조원동 전 수석은 “향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조 전 수석은 “정부가 기후변화에 필요한 모든 재원을 모두 부담할 수는 없지만, 민간에 모두 맡겨 버리는 것은 성장동력을 상실하는 것”이라며 “정부가 공정성과 객관성을 앞세워 인센티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기후 관련 산업을 키울 수 있다”고 밝혔다.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하다가 노무현 정부에서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최종찬 전 장관은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했던 옛 경제기획원과 비슷한 조직이 지금도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최 전 장관은 “현 경제부총리는 각종 현안이 워낙 많기 때문에 미래를 준비하고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업무를 맡을 여력이 없다”며 “이런 역할을 맡을 정부 부처 내 컨트롤 타워의 기능이 지금도 필요하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부총리를 지낸 유일호 전 부총리는 “포퓰리즘을 앞세운 정치 논리에 휘말려서는 안 되지만 경제정책을 정치과정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만 따라오라는 권위주의 시대의 방향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며 “국회를 상대로 하는 것뿐 아니라 정책 추진 과정에서 협조를 끌어내는 것도 정치과정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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