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옥 서강대 명예교수 "남의 기술 베껴선 성장 못해…21세기 경제, 창의력에 달려"

입력 2023-05-23 18:32   수정 2023-09-21 09:13


21세기 경제질서가 대변혁을 맞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양대 축으로 한 ‘경제블록’이 부상하면서 세계 각국의 이합집산이 한창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경제와 안보가 같은 선상에 놓인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하고 탈세계화는 가속화하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수입액 증가와 반도체 경기 침체, 중국의 기술 고도화에 따른 대중 무역수지 악화로 한국의 무역적자는 급속히 쌓여가고 있다. 미국 시장이 그나마 부상하고 있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자국 우선주의 강화로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만성적인 대일 무역적자는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중국에 대한 의존부터 줄여야 한다. 중국은 후진적이고 경직적인 체제 때문에 미국을 이길 수 없다. 북한 핵문제 등과 관련해 언젠가는 한국에 타격을 줄 경제정책을 취할 것이다. 중국 대신 급부상하는 인도와 동남아시아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동맹국인 미국과의 경제 관계는 더욱 돈독히 해야 한다. 미국의 보호무역에 대응해 한국은 가격 경쟁력부터 갖출 필요가 있다. 하루빨리 노동개혁을 이뤄 인건비 부담을 낮춰야 한다.

21세기 경제는 창의력 경쟁이 가장 큰 관건이 될 것이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이제 남의 기술을 베껴서는 성장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해외에서 공부한 인재들이 한국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점은 우려스럽다. 대학에서든 기업에서든 고급인력은 기존 인력의 몇 배 연봉을 주고서라도 데려와야 한다.
"경제·안보 한몸인 시대…中 의존도 줄이고 동맹경제 올라타야"
세계화 저물고 동맹경제로 재편…저성장 위기 해법은 '기술 축적'
지금까지 거의 모든 국가가 세계화의 편익을 누렸다. 미·중 패권 갈등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에도 불구하고 세계화가 끝났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세계화의 진전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의 세계 경제질서는 어떻게 될까. 중국은 옛 소련이 간 길을 비슷하게 걸어갈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는 다른 나라의 기술을 베껴 성장해 왔지만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다. 공산당이 강압적인 통치를 하고 있는 만큼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하기 어렵다.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가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은 경제인들에게 굉장히 나쁜 시그널이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창의력은 정부가 인위적으로 키워낼 수 없다. 결국은 창의력이 승패를 좌우한다.

중국은 경제시스템을 개혁하지 않는 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 미국의 경제시스템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1980년대 일본 경제가 호황을 맞으면서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지만 미국의 앞선 시스템이 결국 1990년대 호황을 만들어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경기 부양을 위한 정부 개입을 하지 않았다. 이후 재선에 실패했지만 그 덕에 미국 경제는 자연스런 구조조정을 거쳐 회생했다. 미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다.

인구 측면에서도 중국은 줄고 있고, 미국은 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중국이 미국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국 정부의 채무불이행(디폴트) 문제도 현실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예산안까지도 법으로 만드는 나라다. 법에 의해서 정부 채권까지 발행한다. 그만큼 힘이 센 의회가 행정부를 윽박지르고 있는 게 부채한도 협상의 모습이다.

중국은 북한 핵개발에는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면서 우리가 방어적 목적으로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할 때는 경제보복을 했다. 경제교역의 원리를 오해한 처사다. 중국과의 교역은 안보적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중국 내에서 생산비용이 증가하면서 이제는 구조조정이 점차 이뤄지고 있다.

한국은 대중 무역적자가 지속되고 있지만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예전부터 개인적으론 기업이 중국에 너무 많이 진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북 안보 문제가 터졌을 때 중국과의 경제 관계에서는 큰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경제가 발전하면 줄어드는 중국 수요를 상당 부분 상쇄할 것이다. 인도는 굉장히 안정적인 나라다. 민주주의를 하고 있고, 한 번도 제도적으로 흐트러진 적이 없다. 중국과 달리 격변하는 게 없는 나라다. 인도 인구는 중국을 앞질렀고,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인재가 많다. IT와 자동차를 중심으로 교역시장이 커질 것이다. 동남아 시장을 노리는 국가도 점점 늘고 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동남아 시장 공략에 공을 들였다. 한국은 좀 늦긴 했지만 머지않아 같은 선상에서 경쟁하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중남미 시장도 개척해야 한다.

유럽 시장도 넘볼 만하지만 쉽지는 않다. 유럽 국가들은 기술 면에서 한국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가 확산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장이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한국이 시장을 파고들려면 가격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 세계 경제질서는 엉망이 될 것이다. 당장 식량 시장은 완전히 흐트러지게 된다. 우크라이나산 곡물 의존도가 큰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아로 고통받고 있다. 전쟁이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러시아는 이 전쟁을 통해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라앉을 것이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것도 굉장한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대만 침공이 한반도에 미칠 파장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지금 우리는 동맹과의 집단방위를 약화시키면서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그럴 여유도 없다. 안보와 국방이 없는 경제는 사상누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정권의 곡예는 아찔하기까지 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기술 축적이다. 기술 발전이 가속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계기는 산업혁명이다. 공장 생산이 이뤄지고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노동생산성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인구와 1인당 소득이 동시에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빈곤의 함정’이 무너진 것도 그 즈음이다. 그리고 이제는 전자통신을 이용한 디지털혁명에 이어 인공지능(AI)이 인류를 위협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기술이 나라 경제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열쇠가 된 지 오래다.

기술은 21세기 내내 대한민국의 키워드로 남을 것이다. 단기적인 경기 부침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한국이 관리해야 할 핵심은 기술이다. 지금 성장률의 심각한 하락은 우리 경제가 이제 선진국들이 개발한 기술을 도입하는 단계에서 우리가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5%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따라서 연구개발(R&D) 등의 투자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를 유연화하고 재정 또한 소비 중심에서 투자 중심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 정치 구호에 물든 노동조합을 혁파해 노동 또한 기술 중심으로 개혁되어야만 한다. 한국의 노조는 노조가 아니라 철저한 이익집단이다.

규제 족쇄는 한꺼번에 풀어야 한다. 예전에 지인이 10억원을 들여 신기술을 개발했는데 ‘이 기술을 써도 된다’는 법규가 없어서 상용화를 못했다고 한다. 한국은 허용된 것 외에는 다 금지하는 ‘포지티브 규제’ 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금지된 것 외에는 모두 허용하는 선진적인 ‘네거티브’ 방식으로 조속히 전환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특별법 제정도 검토해볼 만하다.

지극히 천편일률적인 교육도 다양화해야 한다. 대학 등록금부터 자율화해야 한다. 지금 대학마다 재정 문제로 우수한 교수들을 뽑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 대학과의 급여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에서는 교수 초봉이 20만달러가 넘는데 한국 대학은 5000만원 수준이다.

서비스산업도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의 서비스산업은 정말 문제가 많다. 의료 금융 법률 등 고급서비스 분야를 국제화해야 한다. 미국은 서비스산업으로 먹고 사는 나라다. 제조업 비중은 20%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한국 국회에서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 12년째 표류하며 통과되지 않고 있다. 국회가 서비스산업 관련 규제 완화 등에 반대하는 기득권을 의식한 탓이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제정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과제 중 하나이기도 한 만큼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

경기 부양에는 신중해야 한다. 또다시 인플레이션이 닥치면 경제가 더 어려워진다. 전기요금을 비롯한 공공요금이 줄줄이 오르는 등 아직도 물가가 불안하다. 올해까지는 물가 안정에 집중해야 한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 ‘나쁜 버릇’은 고쳐야 한다. 지난 정권 때 쌓인 재정적자는 이미 위험 수위다. 가계부채 문제도 심각하지만 정부 부채만큼은 아니다. 경기 불황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다. 부실기업을 정리해주고, 과소비를 줄여주는 ‘클렌징(cleansing) 효과’가 있다.

습관적 추경과 같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그리스 집권당인 신민주주의당(ND)이 지난 21일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는 최저임금 14% 인상 등 전형적인 포퓰리즘 공약을 내세웠지만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한국도 그리스 총선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한국은 인플레이션에 맞서 초기에 금리 인상으로 잘 대응했다. 한국의 경제 관료들은 세계 최상급이다. 정치가 받쳐주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과격한 경제 정책들을 경제 관료들이 상당 부분 막아줬다.

다만 경제 관료들이 더욱 장기적인 안목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과거 정부에서 해운사를 파산시킨 것은 근시안적인 선택이었다. 보다 길게 봤어야 하는데 ‘땡처리’식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관료들은 현 정부에서 끝나는 경제 정책 대신 다음 정부에 넘겨줄 경제 정책을 펴야 한다. 정책이 인수인계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우리 경제에는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라는 머지않아 터질 핵폭탄이 자라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장기적인 투자를 통해 육아와 교육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 노년층에 대한 기술투자 또한 게을리해선 안 된다. 그리고 원활한 공급정책을 통해 주택 문제도 장기적 안목에서 합리적으로 설계돼야만 한다.

■ 조장옥 명예교수는

1982년 서강대 경제학과 졸업
1988년 미국 로체스터대 경제학석사
1990년 로체스터대 경제학박사
1994년~현재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2000~2001년 미국 로체스터대 부교수
2005~2008년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2008~2009년 한국계량경제학회장
2010년 다산경제학상 수상
2010~2011년 한국금융학회장
2013~2014년 홍콩 과학기술대 교수
2016~2017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2022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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