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저녁, '헌팅포차'가 밀집한 서울 강남역 인근의 거리는 젊은 남녀들로 북적였다. 지난 11일 정부가 3년 4개월 만에 사실상 '코로나19 엔데믹(풍토병으로 굳어진 감염병)'을 선언한 가운데, 서울 강남 인근에서 이른바 '헌팅 메카'로 불리는 곳들은 술을 마시고 즐기려는 인파가 가득했다.
"헌팅 술집은 원래 자연스럽게 다른 분들이랑 합석해서 즐기는 분위기잖아요. 모르는 사람들이랑 술 마시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마음에 드는 이성을 찾을 수도 있어서 좋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헌팅포차'를 찾게 됐다는 대학생 김모 씨(22)는 "작년까지만 해도 실내 마스크도 착용해야 하고 해서 굳이 이 거리를 오지 않았다"면서도 "평일 밤인데도 사람이 많아서 북적이는 분위기가 좋다"며 이같이 말했다.
몇몇 헌팅포차 앞에는 손님 수십명이 줄지어 입장을 대기하고 있었다. 야외 테라스석을 포함한 모든 자리가 만석인 탓이다. 오랜 시간 이곳을 대기하던 사람들은 지나가는 다른 무리를 붙잡고 "함께 술집에 들어가자"고 즉석 헌팅을 하기도 했다. 이 헌팅포차 직원은 "30~40분은 대기해야 입장할 수 있다"며 "다른 테이블과 합석하면 더 빠른 입장이 가능하다"고 안내했다.
인근의 다른 술집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 기간 한창 공사 중이었던 한 유명 클럽도 젊은 층이 모여 다시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해당 클럽 앞 관계자는 "오픈한지 50분도 안 지났는데 벌써 50명이 넘게 안에 모여있다"며 "시간이 지나면 더 들어올 것 같은데, 클럽 안에 관계자라든지 아는 분 계시면 더 빠른 입장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헌팅 술집과 클럽 인근 거리에서 본격적인 '헌팅 분위기'가 가열됐다. 길거리에서도 헌팅을 제안하고 거절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젊은 남녀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방 무리가 거절해도 끝없는 요청을 하며 가는 길을 따라가거나, 앉아있던 테이블에 말없이 합석해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한 남성 2명이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여성 2명의 손을 붙잡더니 "조금만 같이 마시다 가자"고 조르다가 여성들의 거절 끝에 발걸음을 돌리는 장면도 목격됐다. 이곳에서 생방송을 하고 있던 한 비제이(BJ)는 여성 무리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즉석에서 남성들을 매칭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거리를 지나가던 인근 주민 이모 씨(26)는 "요즘은 주말 뿐 아니라 평일에도 사람이 엄청 많다"며 "일이 늦게 끝나서 항상 이 거리를 지나서 집으로 가야 하는데, 가끔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들도 보인다. 그래서 이 거리를 걸을 때는 최대한 빠른 발걸음으로 지나가 버린다"고 말했다.
강남역 거리와 함께 대표적인 헌팅 거리로 불렸던 압구정로데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엔데믹 이후 이 시간대만 되면 춤추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붐볐던 유명 라운지 바들도 썰렁한 분위기였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분위기에 일각에서는 "'압구정 펀치남' 논란 때문이 아니겠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이곳에서는 "번호를 알려달라"는 헌팅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한 남성이 일면식 없는 여성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논란이 일었다. 일명 '압구정 펀치남' 사건이다. 당시 A 씨 등 남성 일행 3명은 B 씨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B 씨는 거절했다. 이후 A 씨가 B 씨에 달려들어 주먹 쥔 팔을 크게 휘둘러 얼굴을 가격했다. B 씨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얼굴 뼈 곳곳이 부러지고 이마가 튀어나오는 등 안와골절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SBS '궁금한 이야기 Y'에 소개되면서 공분을 자아냈다. 이에 A 씨는 "B 씨가 일행을 향해 담배꽁초를 던져서 그런 것"이라고 반박했고, 해당 CCTV 영상이 공개돼 누리꾼들 사이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이에 B 씨는 "나는 길가에 던졌지, 가해자 친구에게 던지지 않았다"며 "그리고 만에 하나 그랬다 한들 가해자가 나를 폭행한 사실은 바뀌지 않으며 정당화시킬 수도 없다"고 해명했다.
논란 이후 몇몇 사람들은 헌팅 뿐 아니라 모르는 이성과 마주치는 것에도 두려움을 호소하는 반응을 보였다. 압구정로데오의 유명 헌팅 포차 앞에서 만난 직장인 박모 씨(30)는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즐겨 마시는 걸 좋아해서 헌팅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작년까지만 해도 제대로 못 즐겨서 오랜만에 북적이는 분위기가 좋지만, 굳이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대학생 정모 씨(24)는 "원래 헌팅 제안을 받으면 '죄송하다'고 하고 거절하는데, 거절해도 끝없이 따라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면서도 "이제는 혹여나 괜히 일이 생길까 봐 무섭기도 해서 헌팅 거리 인근을 지나갈 때는 뛰어서 도망가버리거나, 아예 그곳을 안가거나 하는 게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세린 한경닷컴 기자 celi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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