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58년.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쓴 <아가멤논>엔 발밑에 깔린 붉은 비단을 ‘왕의 길’로 묘사한다. 붉은 색소는 곤충에게서 소량만 추출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유럽에선 왕족의 색으로 통했고, 아즈텍과 마야 문명에서도 최소한 귀족 신분이어야 입을 수 있는 색이었다.
인류에게 레드카펫의 판타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적인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어김없이 레드카펫이 등장한다. 칸 영화제 레드카펫은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무대다. 세계의 별들이 1년 중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 샤넬, 크리스찬 디올, 프라다, 구찌, 오스카 드 라 렌타 등 럭셔리 브랜드들은 수십 년간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그해 최고의 배우에게 최고의 드레스를 선보이는 런웨이로 삼는다.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규칙을 깨면서 진화하는 법. ‘남성은 턱시도, 여성은 드레스와 굽이 있는 구두’라는 엄격한 ‘레드카펫 룰’을 깬 배우도 있다. 76년의 역사 속에 이들이 선보인 ‘파격’은 늘 패션계의 큰 파장을 불러왔다.
실제 칸 영화제는 2015년 건강상의 이유로 힐을 신지 않은 관객의 입장을 금지하며 ‘플랫 게이트’라는 오명까지 얻은 바 있다. 이듬해 줄리아 로버츠는 여성에게만 적용된 신발 규정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를 담아 맨발로 레드카펫에 올랐고, 수잔 서랜든은 턱시도에 플랫슈즈를 신기도 했다. 스튜어트는 이런 배우들의 반대 퍼포먼스에도 변하지 않은 칸의 룰을 또 한 번 꼬집은 것.
여배우 전유물? 남성 패피들의 전쟁터
칸의 복장 규정을 깨는 건 여배우들만이 아니다. 올해 칸 영화제에선 남성 스타들이 벌이는 패션 전쟁도 흥미롭다. 전형적인 와이셔츠에 보타이, 재킷 스타일링 대신 살짝살짝 노출한 블라우스, 찰랑거리는 긴 바지 등에 플래시가 쏟아졌다.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단편 영화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로 영화제에 참석한 조연 남성 배우 4인방에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마누 리오스, 제이슨 페르난데스, 호세 콘데사, 그리고 조지 스틴 등이다. 이들 넷은 모두 브랜드 생 로랑의 각기 다른 블라우스를 맞춰 입고 행사장에 나타나 환호를 받았다. 영화제 패션에서 보기 힘든 민소매와 깊게 파인 브이넥의 블라우스를 선택해 뜨거운 여름을 앞둔 칸의 낭만을 표현했다. 너무 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진 탓에 “그들의 노출된 피부가 번쩍이며 빛났다”는 현장 증언이 나올 정도. 리오스는 은색 초커가 달린 흰색 랩 형식의 블라우스를 착용했고, 콘데사는 바지에 금색 펜던트 목걸이를 달고 나타났다. 페르난데스는 목에 리본이 크게 달린 실크 소재의 민소매 블라우스를 선택했다. 이들의 레드카펫 패션이 영리했던 이유는 상의가 아니라 바지와 신발에 있다. 네 사람 모두 튀는 블라우스를 입었기 때문에 자칫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할 수 있었던 스타일이었지만, 네 사람은 같은 색의 바지와 비슷한 에나멜 구두를 맞춰 신으면서 통일감을 줬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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