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터너는 오랜 투병 끝에 스위스 취리히 근처 퀴스나흐트에 있는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터너는 로큰롤 시대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에 데뷔해 30여 년간 무대에 올랐다. 리듬&블루스, 록 등 여러 장르에서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폭발적인 가창력, 거침없는 무대 매너로 사랑받았다.
터너는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인 아이크 터너의 밴드 공연을 보러 갔다가 쉬는 시간에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어 객원 가수로 발탁됐다. 1960년 밴드 이름을 ‘아이크&티나 터너’로 바꿔 듀오 활동을 시작한 두 사람은 1962년 결혼했고, 16년간 함께 활동하며 ‘어 풀 인 러브(A Fool in Love)’ 등 여러 히트곡을 냈다.
그는 몇 년 동안 활동이 뜸하다가 1984년 발표한 앨범 ‘프라이빗 댄서(Private Dancer)’가 큰 히트를 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이 앨범의 대표곡 ‘와츠 러브 갓 투 두 위드 잇(What’s Love Got to Do with It)’으로 198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 등 2개 부문을, 또 다른 수록곡 ‘베터 비 굿 투 미(Better Be Good To Me)’로 최우수 여성 록 보컬 퍼포먼스상을 받는 등 그해 그래미를 휩쓸었다.
그는 아이크&티나 시절 받은 것까지 합치면 그래미에서 8회 수상했다. 음반 판매량은 세계에서 1억5000만여 장에 달한다. 1988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공연은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당시 ‘솔로 가수가 동원한 최다 유료 관객’ 기록을 새로 썼다. 그가 60세이던 1999년 ‘트웬티 포 세븐’ 앨범을 발표한 뒤 이듬해 연 세계 투어 공연은 1억달러(약 1300억원)가 넘는 티켓 판매액을 올려 ‘솔로 가수 역대 최고 수입’으로 기네스에 기록됐다.
1991년 아이크 터너와 함께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입성했다. 2005년에는 케네디센터 공로상을, 2018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터너의 부고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소식”이라며 “그를 사랑한 공동체와 음악산업에 막대한 손실”이라고 애도했다.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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