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옆에 자리 잡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온갖 기계음이 귀에 꽂힌다. 출입문 안쪽은 ‘미술관에 온 게 맞나’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기계음을 따라 들어가니 온갖 종류의 게임기가 나온다. 모두 미술관이 의도한 ‘소음’이었던 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게임사회’ 전시를 기획한 건 ‘비디오게임 등장 50년’을 맞아 게임의 문법과 미학이 동시대의 예술과 문화, 더 나아가 인간의 삶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돌아보자는 취지에서다. 이런 걸 엿볼 수 있는 현대미술 작가 8명의 작품 30여 점을 들여놨다.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란 질문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2012년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스미스소니언미술관이 심시티, 팩맨 등 비디오게임을 컬렉션으로 사들이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이번 전시에는 두 미술관이 당시 사들인 게임 9점도 놓여 있다.
서울박스에서 눈에 띈 작품은 김희천 작가의 대형 신작 ‘커터 3’다. 14m 높이의 대형 LED 패널에 게임 영상을 45분간 상영한다. 관객은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 게임하는 사람과 게임 화면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계속 어딘가에 들어가려고 하지만 ‘출입 실패’란 메시지 앞에 좌절하는 캐릭터는 현대인의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다니엘 브레이스웨이트 셜리의 2021년 작품 ‘젠장, 그 여자 때문에 산다’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품이다. 게임은 대형 화면 앞에 놓인 총 한 자루를 잡는 순간 시작된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정신없이 쏘다 보면 ‘당신은 성소수자와 흑인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여기 있을 자격이 없다’란 메시지가 뜬다. 트렌스젠더이자 흑인인 작가는 “한 사람의 선택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체험해보도록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현대미술 작가 로런스 렉은 연작 ‘노텔’의 ‘서울 에디션’을 내놨다.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모티브로 게임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옛 국군병원 자리에 지어진 점에 착안해 게임 배경을 설정했다.
전시 작품은 거의 다 체험형이다. 관객이 참여해야 작품이 완성된다. 특이한 건 게임에 ‘장벽’을 없앤 것이다. 컨트롤러를 관객이 원하는 대로 조립할 수 있게 만든 것이나 게임 박스 높이를 낮춰 아이도 즐길 수 있게 한 게 대표적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게임을 주제로 한 전시회라는 점에서 평소 미술관을 찾지 않는 사람과도 함께 갈 수 있는 흔치 않은 전시다. 하지만 대부분 체험형 작품인 탓에 관람객이 많을 땐 인내심이 필요하다. 시간이 없다면 ‘체험’이란 핵심을 놓친 채 출구로 향해야 한다. 이럴 땐 놀이공원과 다를 바 없다. 아쉬운 대목이다. 작품의 의미나 작가의 제작 의도를 되새겨볼 여유도 안 준다니.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백미러’다. 관람객이 너무 오래 게임기를 붙들고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설치했단다. 백미러를 통해 내 뒤에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대기자가 있다는 걸 직접 느끼라는 의도다. 전시는 오는 9월 10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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