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상이 21일 공동 참배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1970년 히로시마 평화공원 바깥 외진 곳에 건립됐다. 30년 만인 1999년 위령비의 공원 내 이전을 결정한 이는 히라오카 다카시(平岡敬·96) 당시 시장이었다. 그는 “전쟁이 없는 것만이 평화가 아니다. 차별, 인권침해 등이 없어야 진정한 평화”라고 했다. 시장 취임 첫해인 1991년에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으로 아시아태평양 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평화선언을 발표했다. 일본 정치인 최초의 식민지배 공식 사과였다. 우익의 거센 반발과 신변 위협이 뒤따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역사를 한 걸음, 아니 반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이런 사람들이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수구 세력들이나, 자나깨나 ‘죽창가’만 불러대는 한국의 반일·혐일론자들이나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 파기,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이은 무역 갈등으로 양국 관계를 수교 이후 최악의 상태로 내몰았다.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느닷없는 독도 방문으로 손해를 본 건 한국이었다. 일본 내 반한 감정이 격화되면서 한류 열풍에 찬물을 끼얹었고, 매년 증가하던 방한 일본인 관광객도 2012년 352만 명에서 2015년에는 183만 명으로 급감했다.
과거사 사죄, 교과서 및 역사 왜곡, 독도영유권 주장 등은 한·일 관계의 해묵은 문제여서 변수가 아니라 상수에 가깝다. 이걸 변수로 만드는 게 일본의 극우와 한국의 죽창가 부대다. 여기에 발목이 잡혀 경제, 문화 등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다. 이견을 좁히는 건 중장기적 과제로 두고 당장의 협력이 필요한 사안에 집중해야 한다. 당장 결론이 나지도 않을 일로 다퉈봐야 관계만 나빠질 뿐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한·일 관계 악화를 반기고 즐기는 건 북한 아닌가.
그런 점에서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 외교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는 행태다. 한·일 관계 회복을 위한 윤석열 정부의 선제적 양보를 ‘굴종 외교’ ‘퍼주기 외교’로 몰아붙이고 조롱하는 야당의 공세는 무책임을 넘어 악의적이다. 강제징용 제3자 배상안만 해도 야당은 비판만 할 뿐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제원자력기구의 과학적 검증이나 한국 시찰단의 평가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무조건 못 믿겠다고 한다. ‘후쿠시마표 오염 생수’ ‘방사능 테러’ ‘독극물’ 등 괴담 수준의 말폭탄으로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자기 진영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실상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무지와 편견 속에서 증오의 싹이 튼다. 상대 진영의 상식적 행동조차 무조건 비난하고 깎아내리면 증오만 깊어질 뿐이다. 광기와 광신의 불꽃이 가장 쉽게 옮겨붙고 활활 타오르는 것이 증오라고 한다. 외교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면서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고 증오의 집단정서를 부추기는 곳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22일 도쿄로 가서 오야마 목사의 빈소를 조문한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는 “오야마 목사는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며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그분의 아들인 오야마 세이지 목사와 한·일 간 화해의 다리를 놓는 데 힘을 합치기로 했다”고 말했다. 히라오카 전 시장의 용기 있는 결단은 관계 개선에 나선 한·일 정상의 공동 참배를 이끌었다. 역사는 이렇게 화해와 협력 속에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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