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군 우이도로 가는 길은 고행이다. 목포에서도 약 100㎞의 바닷길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절애고도다. 신유박해로 귀양길에 오른 정약전의 유배지 중 하나가 당시 소흑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우이도였다. 하지만 발길 떼기가 어렵지, 우이도에 한 번 다녀온 사람은 안다. 섬 여행의 참맛이 무엇인지를.
국내 유일무이의 해안 사구
우이도는 걸어서 2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섬이다.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다. 주봉인 성산봉은 361m로, 그 위에 서면 다도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섬멍’하기에 최적지다. 돈목에서 성촌 마을까지 이어지는 돈목해수욕장도 우이도의 자랑거리다. 개흙이 섞여 있지 않고 순전히 모래로만 이루어진 백사장은 푹신한 카펫 위를 걷는 듯 편안하다. ‘발랑게’로 불리는 작은 게의 최대 군락지이기도 하다.
특히 돈목해변의 해안 사구는 이국적인 느낌마저 드는 명소다. 우이도의 모래바람이 만들어 낸 걸작으로, 높이 80여m의 모래산이다. 한때 관광객들이 비닐포대 미끄럼을 수도 없이 타는 바람에 무너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최근 수년간의 보존 끝에 원래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정해진 산책로를 따라 사구 정상에 서자, 시원한 바닷바람에 시시각각 변하는 모래톱이 마치 중동의 어느 사막 같다.
우이도 사람들은 사구를 ‘산태’라 불렀다. 맑은 날, 사구 꼭대기에선 45㎞쯤 떨어진 맹골도까지 눈에 잡힐 듯 가깝다. 여름철 피서지로 이만한 데가 없다. 어떻게 모래가 급한 경사면을 이루며 쌓일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 대학 연구진이 모래산 경사면과 정상부 주변에 실험 장비를 갖다 놓고 모래의 움직임을 측정한 일도 있다고 하니 불가사의라 할 만하다.
사구 정상과 달리 돈목 해변의 바다는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 1970년대엔 미군이 군함을 정박해놓고 그들만의 휴양지로 썼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그러나 관광객이 빠진 해변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 그런 비감(悲感)이 시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이생진이라는 시인은 모래사장의 작은 마을인 성촌마을을 이렇게 노래했다.
성촌마을은/돈목마을보다 더 야위었다/교회도 없고 폐교도 없다/나는 불쑥 외로움을 자랑한다/성촌 백사장은 그만큼 혼자/외치는 소리가 많다/떠내려온 수심(愁心)도 많다/떠내려온 대나무 지팡이를 줍는다/김삿갓이 여기까지 온 기분이다/막걸리 생각이 나는데/이 마을엔 막걸리가 없다/오 그렇지/바다막걸리/바다막걸리 한 잔/나는 그것을 마시고 비틀거린다
정약전과 문순득의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섬
풍경 못지않게 우이도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도 옹골차다. 약전은 지금의 흑산도로 건너가기 전, 우이도에서 기거했다. 자식 둘까지 낳았다고 하니 꽤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도 우이도는 ‘모래의 섬’이었을 것이다. 우이도엔 이런 말이 전한다. ‘우이도 처녀는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간다’
용산구청과 남영역 중간 어디쯤 있던 석우(石遇)리에서 동생인 정약용과 귀양길에 오른 약전은 무안에서 평생의 친구이기도 했던 동생과 헤어져 따로 배를 탔다. 암태, 팔금도를 거쳐 안좌, 도초, 비금도에 머물다가 우이도로 들어갔다. 비금도까지의 다도해는 내해(內海)고, 그 다음의 바다는 외해로 불렸다. 잔잔했던 바다는 비금을 넘어서자마자 거칠게 돌변한다.
칠흑 같은 그 바다를 44세에 건너간 약전은 생을 다할 때까지 육지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그에게 우이도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제2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척박한 우이도에서 가족들을 건사하기 어려워지자 약전은 더 큰 섬인 흑산도로 거처를 옮겼지만, 생의 끝자락에 다시 우이도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1년을 살고 삶을 마감(1816년)했다.
섬 여행자에게도 우이도는 ‘엄마의 밥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특별한 곳이다. 식당 하나 없지만, 우이도의 음식은 내로라하는 식객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는 탤런트 최불암, <백반 기행>의 허영만도 첫 회를 우이도에서 시작했다. 제철 해산물과 텃밭의 싱싱한 채소로 만들어 낸 우이도 민박집의 밥상만으로도 이곳을 찾는 이유로 충분하다.
우이도의 또 다른 ‘인물 스토리’ 주인공으로 문순득을 빼놓을 수 없다. ‘바다 보부상’이던 그는 1801년 12월 흑산도 남쪽 수백 리에 있는 태사도로 홍어를 사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폭풍을 만나 표류했다. 햇수로 5년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중국 광저우, 마카오, 베이징 등에 체류했으니 조선 사람으로는 세상 문물을 가장 많이 경험한 인물이다.
약전은 문순득을 우이도에서 만났다. 홍어 상인의 구술을 약전은 꼼꼼히 기록해 정약용의 제자인 이강회를 통해 세상에 전했다. 표해시말(漂海始末)이 나온 배경이다. 문순득의 5대손인 문종옥 우이도 진리 이장은 “우이도 진리의 옛 선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선창(1745년)”이라며 “방파제 역할 뿐만 아니라 배를 수리하고 짓는 선소의 기능도 했다”고 설명했다.
3만 그루의 수국으로 물든 도초도
우이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여정은 도초·비금도다. 인구 50여 명 남짓의 우이도에 비하면 큰 섬이다. 도초도만 해도 인구가 2700명쯤 된다. 비금도와는 다리로 연결돼 있어 여의도의 몇 배 크기다.
도초·비금도는 상전벽해의 섬이다. 변화의 속도가 어지간한 도시 못지않다. 신안은 요즘 민관이 힘을 합세해 주요 섬들을 거대 해양 정원으로 만들고 있다. 6월의 도초도는 만개한 수국으로 덮여 있다. 신안군청이 옛 초등학교 건물과 대지를 매입해 수국정원을 조성했다. 15종 3만 그루의 수국이 식재된 산책로는 6~8월이면 자주색, 보라색, 흰색, 파란색으로 색의 ‘하모니’를 선사한다.
신안을 꽃의 섬으로 만들고 있는 주인공은 박우량 신안군수다. 퍼플섬으로 유명한 반월·박지도가 대표적인 꽃섬이다. 마을을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이면서 인구 136명(작년 말 기준)의 섬에 작년 한 해에만 38만5000명이 다녀갔다. 앞으로 신안군은 임자도를 홍매화의 섬으로 만들고, 장산도는 백목련, 은목서 등으로 꾸며진 ‘화이트의 섬’으로 만드는 등 ‘1섬, 1컬러’를 추진 중이다.
꼭 이래야만 할까, 의문이 들 법한데 박 군수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서울의 유명한 조경학 박사들에게 자문받았지요. 다들 철마다 다양한 색을 만들어 내는 정원을 가꾸라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작은 섬은 인구라고 해봐야 50명 남짓이고, 대부분 할매 할배들이에요. 하나만 죽어라 배워도 어려운 판에 그 많은 꽃을 어떻게 공부합니까. 그래서 섬 하나에 하나의 색만 심자고 정한 겁니다”
수국정원과 함께 도초도의 명물이 된 팽나무길은 박 군수와 신안군 공무원들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처럼 아름드리 나무가 양옆에 줄지어 선 산책로를 만들고 싶었던 신안군은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수령 70~100년 이상 된 팽나무를 기증받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팽나무 740그루를 들여왔다. 덕분에 190억원의 예산을 절감했다.
기증은 받긴 했는데 난제가 남아 있었다. 다 자란 나무를 전혀 다른 토양에 심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들마다 “무모한 일”이라며 우려했다. 박 군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신안군이 어떤 곳입니까. 꽃과 나무 심기로는 아마 전국에서 노하우가 가장 많을 겁니다. 팽나무도 죽지 않도록 엽면시비라는 방법을 적용했어요. 자연 그대로 심은 다음에 대나무 스프링 쿨러를 이용해 나뭇잎에 수분과 양분을 충분히 공급하면서 관리한 거죠. 5t 트럭 740대에 싣고 배에 실어서 심었는데 95%가 살아남았습니다”
‘환상의 정원’으로 이름 붙여진 4㎞의 팽나무숲길은 2021년 산림청이 주관한 녹색도시 우수사례 공모전에서 가로수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덕분에 도초도는 지난해 13만명이 다녀간 신안군의 ‘에이스’로 거듭났다.
도초·비금도를 온전히 즐기려면 하루쯤 숙박하는 게 좋다. 도초도 사목해수욕장 인근에 깔끔한 숙박 시설도 마련돼 있다.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촬영지도 도초도다. 비금도에선 하트 모양을 닮은 하누넘 해수욕장과 모래사장이 4.2㎞ 길이로 펼쳐진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유명하다. 산을 좋아한다면 비금도 그림산을 추천한다. 기린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그림산이라고도 하고, 경치가 그림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는 설도 있다.
신안=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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