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인공지능(AI) 붐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반도체 기업으로 부상한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이 미국 반도체법에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냈다.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법이 실리콘밸리 기업의 손을 등 뒤로 묶어 놓고 있다”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구매할 수 없다면 자체적으로 만들 것이다” “중국 시장을 빼앗길 경우 비상계획이 없다” “미국 기술산업 시장의 3분의 1인 중국에 대한 공급 능력을 상실하면 미국 내 반도체 제조가 필요할지 의문이다” “반도체법이 망신당할지 모른다.” 보호주의에 매몰된, 산업이 작동하는 진실과 동떨어진 책상머리 정책과 규제, 법이 황당하다는 지적이다.
정치인이 반도체산업 미래를 좌우하느냐는 불만은 미국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중국이 어느 날 공급망에서 마술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전제부터 오류라는 반박은 올초 세계경제포럼(WEF)에서도 제기됐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경고에 가담했다. 중국 시장과 미국 등 나머지 세계시장은 서로 얽혀 있는 ‘결합쌍둥이(conjoined twin)’라서 억지 분리는 모든 산업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침묵하고 있는 다수 기업인도 동조하는 분위기다. 시장에 대한 정치의 사려 깊은 접근을 요구하는 기업인들의 원초적·본능적 주문은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한 번영의 원리 그대로다.
유럽연합(EU)이 ‘디커플링(decoupling)’에서 ‘디리스킹(derisking)’으로 이동했다. 위험 축소는 복잡계 경영이론에선 너무나 당연한 전략이어서 특별할 것도 없다. 핵심은 그 배경에 있다. “중국과의 디커플링은 가능하지도, 유럽의 이익에 부합하지도 않는다”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이 한마디가 유럽 정상들이 잇달아 중국을 찾아간 이유를 다 설명해준다.
미국의 미묘한 변화도 엿보이기 시작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조만간 해빙기(thaw)의 시작을 보게 될 것”이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간 회담의 연장선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내년 미국 대선에서 경제 성적이 중요 변수란 점을 모를 리 없다. 중국과 물밑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디커플링 대신 디리스킹을 추진한다는 주요 7개국(G7) 선언은 이런 일련의 산물로 보인다. 말이 G7이지 미국을 뺀 6개국 국내총생산(GDP)을 다 합쳐봐야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 고백이다.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는 보아오 포럼에서 중국의 1인당 GDP가 2035년 두 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성장률이 장기 평균선을 크게 웃돌지 않으면 미·중 간 GDP 역전도 시간문제다. 시장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면 미국의 대중전략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경제안보 시대 기술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아무리 좋은 기술도 시장을 만들지 못하면 가치가 없다. 기술이 우월하다고 반드시 표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시장이 선택한 기술이 승자요, 표준이다. 기술과 기술자, 기업가는 시장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한다. 과거 영국이 첨단기술 유출을 막겠다고 수출규제에 해외 이주와 여행 금지까지 불사했지만, 미국은 산업혁명에 성공했다. 시장을 향한 거역할 수 없는 이동 덕분이었다. 이런 역사를 무시하고 국가마다 기술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수출규제에 나서면 그날로 무역은 죽고 시장은 끝장난다. 시장이 사라지면 기술혁신도 사라진다. 시장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법이 성공할 수도 없고, 성공해서도 안 되는 이유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부 장관은 “(미국의 리더십 상실로) 세계가 무질서해졌다”고 진단했다. 마이크론에 대한 중국의 규제에 발끈하는 미국의 또 다른 얼굴은 무질서 속에서도 확인시켜주는 게 있다. 국가도 기업도 시장 앞에 장사(壯士) 없다. 이데올로기도 동맹도 시장 앞에선 맥을 추지 못한다. 기업인들이 정부에 묻는다. 중국 시장에 대한 전략이 무엇인가. 미·중 관계가 냉·온탕을 오가더라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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