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일본서 '잃어버린 10년' 보낸 韓기업

입력 2023-05-31 18:20   수정 2023-06-01 00:34

“일본 기업 ‘킬러’로 불리며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로 약진을 이어온 한국 기업에 암운이 감돌고 있다. 소니·파나소닉 가전사업을 붕괴로 몰아넣은 삼성전자, 연간 생산량에서 혼다·닛산을 제치고 도요타를 맹추격하던 현대자동차, 신일철주금을 웃도는 이익을 자랑하던 ‘철의 거인’ 포스코. 이들 기업이 육중고(六重苦)에 시달리고 있다.”

2014년 8월 일본 경제 주간지 다이아몬드가 ‘삼성전자·현대차·포스코의 추락’이란 제목으로 전한 특집호(號) 내용이다.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이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집권한 지 2년 만이었다. 이때부터 한·일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일본 소비자의 외면 속에 한국 제품의 점유율이 곤두박질쳤다. 일본 내 2위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삼성전자 갤럭시는 2014년 순위권(5위) 밖으로 밀려났다. 급기야 삼성은 2015년 S6부터 한국 기업에 대한 반감을 의식해 스마트폰 뒷면에 ‘SAMSUNG’ 로고까지 뺐다. 세계 시장에선 1~2위였지만 일본 시장은 난공불락이었다.

현대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9년 일본 승용차 시장에서 철수한 현대차는 상용차 시장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마저 2018년엔 버스 판매량이 12대에 그쳤다. 전년 대비 10분의 1 토막 났다. 2020년엔 단 한 대도 못 팔았다. 문재인 정부의 한·일 위안부 협상 파기, 일본 강제징용 배상 문제, 일본의 수출규제 등으로 한·일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시기다.

일본은 갈라파고스섬에 비유되곤 한다. 기술이나 서비스에서 국제 표준에 맞추지 못하고 독자적인 형태를 고집해 세계 시장에서 고립된 일본 가전제품을 두고 갈라파고스화란 용어도 생겨났다. 주로 기업이나 산업에 빗댄 말이지만 일본 소비자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가 원하지 않고 이웃이 싫어하면 알아서 안 하는 게 일본인이다. 일본 가전·자동차 시장이 ‘외국산의 무덤’으로 불린 이유다. 갈라파고스적 성향에 반한 감정까지 겹쳤으니 일본 시장에서 성공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하지만 일본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다. 지난해 일본 스마트폰 판매량은 2985만 대로, 세계 5위였다. 자동차 판매량은 420만 대에 달했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 인도에 3위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여전히 세계 4위다. 최근엔 경제도 살아날 조짐을 보인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25년 만에 한국을 제칠 기세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일 간 해빙 무드가 감돌면서 변화의 모습도 감지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 갤럭시 S23 출시 때부터 SAMSUNG 로고를 다시 박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일본 업체를 모두 제치고 점유율(10.5%) 2위를 회복했다. 2013년 이후 9년 만의 최고치다.

지난해 현대차는 12년 만에 일본 승용차 시장에 재진출했다. 아이오닉 5, 넥쏘 등 친환경 차를 들고 온라인, 카셰어링 시장 공략에 돌입했다. 장재훈 현대차 사장은 “일본에서 ‘현대차가 이렇게 좋나’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목표”라며 “일본에서 선전하면 일본 브랜드 텃밭인 동남아에서 분위기가 바뀔 것”이라고 했다.

지난 10년간 한국 기업에 일본은 ‘잃어버린 시장’이었다. 한·일 정상 간 셔틀 외교 복원으로 양국 관계도 정상화하고 있다. 더 이상 외교가 기업의 발목을 잡아선 안 될 일이다. 일본 시장에서 ‘반한의 족쇄’를 푼 한국 기업들의 선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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