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순라길. '뉴트로(new+레트로)' 감성이 어우러진 이곳의 골목은 젊은 남녀들로 북적였다. 지난달 11일 정부가 3년 4개월 만에 사실상 '코로나19 엔데믹(풍토병으로 굳어진 감염병)'을 선언한 가운데, 마스크를 쓰지 않고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도보 상권이 활기를 띠고 있다. 그중에서도 골목마다 예스러움과 '힙(hip)'함이 녹아든 '서순라길'은 MZ(밀레니얼+Z)세대의 '신흥 핫플'로 자리 잡았다.
"특유의 예스러운 분위기가 힙하게 느껴져요. 건물이 한옥 구조로 돼 있거나 외관이 허름해서 옛날 분위기가 나는데, 가게 내부는 또 '요즘 감성'이거든요. 그런 것들이 어우러지다 보니 신선하고 좋아요"
친구들과 오랜만에 야외 나들이를 위해 서순라길을 찾았다는 대학생 이모 씨(25)는 "이제는 마스크도 안 써도 되고, 날씨도 많이 풀려서 요즘에는 걷기 좋은 동네를 많이 가는 편"이라며 "친구들과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는 게 취미인데, 이곳이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오전 11시 30분께 막국수와 메밀 만두전골 등을 파는 음식점은 11시에 문을 열자마자 자리가 만석이 된 탓에, 20명가량이 긴 대기 줄을 서 있었다. 특히 간판마저 떨어져 나가서 허름해 보이는 수제빗집도 내부에 마련된 좌석이 한정된 탓에 점심시간이 되자 대기 줄을 서기 시작했다. 심지어 혼자 온 젊은 손님들은 모르는 손님과 합석해 식사해야 하는 상황을 감수하고 밥을 먹는 상황도 펼쳐졌다.
서순라길은 조선시대에 도성의 치안을 담당하던 순라군들이 순찰했던 종묘의 서쪽 골목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진 상권으로, 종로구 종로3가 45-5에서 시작해 권농동 26까지를 잇는 도로에 해당한다. 일각에서는 돌담길을 따라 꽃이 피는 봄과 가을에 유독 예쁜 골목인데다, 한옥과 고궁의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분위기와 현대적인 감성이 어우러진 매력을 갖춘 상권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간 서순라길은 종로 인근의 익선동, 인사동과 달리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숨은 핫플'로 불려왔다. 하지만 엔데믹과 함께 찾아온 이른 초여름 날씨에 현재 이곳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힙지로'로 불리는 을지로 골목에 이어 '힙순라길(힙과 서순라길의 합성어)'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다. 뉴트로 열풍으로 아날로그 감성을 그리워하는 MZ세대들의 취향을 반영한 아이템이 줄지어 들어섰기 때문이다.
'할매니얼(할머니+밀레니얼)' 열풍이 불면서 전통 차와 술, 음식 등에 대한 MZ세대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상권 회복에 힘을 더한 것으로 보인다. 방문객들에 따르면 저녁 시간대 돌담길을 배경 삼아 막걸리 등 전통주를 즐길 수 있는 한 술집은 평일에 사람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2시간가량 웨이팅해야지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한옥 구조로 된 맥줏집도 젊은 직장인들의 소개팅 장소로 입소문이 나면서 2~3주 전 예약은 필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 전후로 MZ세대의 취향에 맞는 힙한 아이템 가진 젊은 창업자들이 자리하기 시작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 이곳의 음식점, 카페, 술집 등이 입소문 타면서 밤낮 할 것 없이 인기를 타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그간 코로나19(팬데믹)로 주춤했던 인파들이 실내 마스크 해제 등 영향을 받으면서 폭발적으로 몰리고 있다는 반응이다. 밤낮없이 몰리는 MZ세대의 발길을 잡기 위해 낮에는 카페, 밤에는 라운지 바로 '이중 운영'하는 매장들도 여럿이다.
서울시 상권분석 서비스에 따르면 젊은 층의 수요를 회복한 서순라길의 점포 수는 지난해 말부터 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4분기 서순라길 인근의 점포 수는 전년 대비 15개 증가해 총 1324개가 됐다. 이 중 일반점포가 289개, 프렌차이즈가 36개로 특색있는 가게들이 상권의 주를 이룬다. MZ세대들의 인기에 힘입어 매출도 증가세다. 서순라길의 점포당 월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4분기 4956만원으로 직전 분기 대비 1241만원가량 뛰었다.
또한 엔데믹을 맞아 외국인들의 방한도 눈에 띄게 늘어난 가운데, 서순라길은 한국관광공사가 지난달 25일 선정한 '한국의 숨은 골목 맛집 여행' 일곱 군데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는 최근 1년 동안 최소 3곳 이상 국내 여행을 하고 맛집을 중심으로 여행 일정을 계획하는 20∼40대 한국인 1058명을 대상으로 '외국인 관광객에게 소개할 만한 골목과 골목 맛집'을 묻는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선정한 결과다.
서순라길을 찾은 외국인들은 골목마다 역사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어서 좋다고 입을 모았다. 주변의 인사동, 익선동보다 요즘 감성이 묻어난 'K-스타일'을 찾으러 이곳에 온다는 후문이다. 이날 한국인 친구의 소개로 서순라길 맛집 탐방을 하게 됐다는 미국인 마이클 조 씨는 "친구한테 한국의 전통 분위기를 체험하고 싶다고 했더니 이곳에 데려왔다"며 "이곳에 줄 서서 먹는다는 맛집이 있다는 게 굉장히 신기한 문화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서순라길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겨냥하기 위한 'K-주얼리' 가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곳이기도 하다. 지난달 종로구는 서순라길과 관련, 서울시 산업·특정 개발진흥지구 운영평가에서 최고등급인 'S등급'을 획득하고 사업비 3억원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앞서 구는 지난해 주얼리 판로 지원을 위해 서순라길 일대 점포환경 개선에 앞장섰다. 올해는 달라진 귀금속 산업 현황을 반영해 진흥계획을 재수립하고, 오는 10월 K-주얼리 페스티벌을 개최해 MZ세대와 외국인 관광객 수요를 확보할 전망이다.
김세린 한경닷컴 기자 celi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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