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는 평생 그림 앞에 성실했다. 사정이 허락하면 매일매일 그렸다. “붓을 들면 야속하기만 한 세상일이 머리에 떠오르나 그러나 내가 붓을 듦으로 해서 이런 야속한 것들을 이겨갈 수가 있다”(파리에서 보낸 편지), “난 계속 몸이 괴롭지만 일만은 늘 하고 있다. 일을 함으로써 모든 것을 이겨가는 것 같다”(뉴욕에서 보낸 편지), “종일 일하고 밤에도 일한다”(<김환기 뉴욕일기>)….
“고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김환기는 손에서 붓을 결코 놓지 않았다. ‘한 점 하늘’ 전시에 나온 김환기 작품 세계의 변천사는 이처럼 그가 하루하루 쌓은 노력이 그린 궤적이다. 117점의 시기별 주요작과 김환기가 소장했던 달항아리, 100점가량의 방대한 아카이브 중 가려 뽑은 작품들로 김환기의 삶과 작품 세계를 정리했다.
1937년 4월, 스물네 살의 청년 화가 김환기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당시 일본은 인상주의 이후 입체주의부터 초현실주의 등 여러 유럽 미술사조가 직수입되는 아시아의 미술 중심지였다. ‘론도’(1938)는 그가 배워온 추상 양식을 적용한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의 특징적인 색면(色面) 구성은 작가의 말년 점화(點畵)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꽃가게’(1948)에서도 훗날 점화로 발전할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처음 나온 이 작품은 꽃들을 큼직한 점으로 표현하고 선반을 수평선으로 단순화하는 등 사실을 재현하면서도 점·선·면이라는 추상의 원리에 충실하다. ‘판자집’(1951)은 6·25 전쟁 중 김환기가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며 그린 작품. 찌는 듯이 덥고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다락방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김환기도 그런 자신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저 그릴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이런 게 예술과 싸우는 것일까?”(<사상계>)
김환기는 한국의 전통 미술과 자연을 사랑했다. 백자대호라는 멋없는 이름의 백자에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게 그다. ‘달빛교향곡’(1954)은 김환기의 달항아리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그림 중 하나다. 달항아리는 그림 속 좌대 위에서 관객의 눈과 마주하고, 뒤에 걸린 은은한 푸른색의 보름달이 이를 비춘다.
한국적 소재에 대한 사랑은 1956년 파리로 건너간 뒤 더욱 깊어졌다.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정신(詩精神)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1957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김환기는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깨달음을 살려 같은 해 발표한 ‘영원의 노래’에 구름과 산, 학, 도자기, 매화, 달 등 한국적 도상들을 리듬감 있게 배치했다.
한국적이고 서정적인 추상 작업을 이어가던 1963년, 50세의 김환기는 세계 미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 또 다른 도전에 몸을 던졌다. 1년 뒤에는 개인전도 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전시에 대해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모방”이라고 혹평했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형식을 거듭 실험하던 김환기는 마침내 ‘점’을 재발견한다. ‘북서풍 30-VIII-65’ 등은 그 연구의 결과물이다.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김환기 뉴욕일기>)
1969~1970년 김환기의 점화는 마침내 전면점화로 진화한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1970)이 그 결과물이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김환기 뉴욕일기>) 세계에서 통하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아름다움, 그 속에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있었다.
캔버스를 두꺼운 면인 ‘코튼 덕’으로 바꾸고, 유화 물감을 희석하고, 점들을 유려한 곡선에 따라 펼치고…. 기법과 구성은 나날이 발전해 마침내 ‘하늘과 땅 24-IX-73 #320’(1973)에서 절정을 이룬다. 점·선·면이 완벽하게 조화돼 김환기의 ‘푸른 점화’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다. 하지만 평생에 걸친 처절한 노력은 그의 몸을 좀먹었다. 건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 있었다. 작품을 완성한 날 그는 일기에 썼다. “죽을힘을 다해서 완성.”
푸르던 그의 점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걸까. 병세가 악화하면서 그림은 어두워진다. 유려했던 곡선도 가지런히 배열된 점과 직선으로 바뀌며 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17-VI-74 #337’(1974)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으로, 김환기는 이 작품을 그린 뒤 다음달인 7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김환기 뉴욕일기>). 죽는 날까지도 그가 괴로워하던 건 ‘더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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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성수영 기자
이미지=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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