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CSR은’과 ‘CSR이란’에서는 R을 ‘알’로 읽었다. 이에 비해 ‘CSR를’과 ‘CSR가’에선 R을 ‘아르’로 읽은 것이다. 앞말에 받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말 조사가 ‘-은/는, -이란/란, -을/를, -이/가’로 달라진다. 이런 부분은 글쓰기에서 의미가 달라질 만큼 중요 사항이 아니라고 치부돼 자칫 간과해왔지만, 실은 늘 눈에 거슬리는 ‘손톱 밑 가시’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언제부터, 왜 영문자 R을 ‘아르’로 읽고 써왔을까? 오랫동안 ‘아르/알’은 우리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알’로 읽는데, 규범은 ‘아르’였다는 점에서다. 더구나 그 ‘아르’가 이론적·문헌적 근거 없이 잘못 읽고 표기한 데서 출발해 관행적으로 우리말 표기의 하나로 자리잡아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2022년 국립국어원은 이 표기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도대체 이 ‘아르’의 근거는 무엇일까? 아무리 문헌을 뒤져도 왜 ‘아르’로 적어야 하는지 규명할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 1957년 완간된 한글학회 <큰사전>은 표제어로 ‘유에스에스알’을 올렸다. 유에스에스알(U.S.S.R)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즉 지금은 사라진 ‘소련’을 가리키던 말이다. 우리말 최초의 대사전 격인 <큰사전>에서 당시 R을 ‘알’로 읽고 적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문제는 ‘R’을 ‘아르’로 적게 된 이론적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영어 R의 발음은 영국식으론 [a:], 미국식으론 [a:r]다. 특히 영국영어이든 미국영어이든 어말에서 [r]이 실현되지 않는다. 가령 ‘넘버(number), 보일러(boiler), 기타(guitar)’ 등 몇 개만 살펴봐도 어말의 [r]은 한글 표기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게 확인된다.
R을 ‘아르’로 적는 유일한 근거는 외래어 표기법상 ‘국제음성기호와 한글대조표’에서 자음 앞 또는 어말의 [r]는 ‘르’로 적도록 돼 있다는 것 정도다. 또 일본에서 ‘R’을 ‘アル’([a:ru]·아루)로 읽고 적는 점이 우리 규범이 ‘아르’로 된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결국 그동안의 표기인 ‘아르’는 일본식 발음과 1970년대 이후 기존 국어사전 등에서 제시된 표기가 관행적으로 이어져온 것으로 판단된다.
국어원은 2022년 말 R의 ‘알’ 표기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아르’를 폐기해야 할지도 고민했다. 그 결과 복수 표기를 인정하기로 했다. 당장 ‘아르’를 폐기할 경우 많은 비용과 표기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영어 단어를 고쳐 적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어지는 토씨까지 전부 바꿔야 하기에 굉장히 큰 작업이다. 물론 지금같이 압도적인 ‘알’ 발음과 표기가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알’ 하나로 통일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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