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폭탄처럼 공을 가능한 멀리 떨군다. 드라이버 샷이 떨어진 곳이 러프든 페어웨이든 상관없다. 웨지로 힘껏 퍼내면 러프에서 쳐도 공을 그린에 세울 수 있으니까.
이른바 ‘밤앤드가우지(bomb&gouge)’는 브라이슨 디섐보(30·미국) 같은 힘 있는 남성 골퍼의 상징이었다. 정교한 아이언샷으로 승부하는 여자 투어에선 이런 전략을 쓰는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난해 6승을 거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최강자 박민지(25)의 평균 드라이브 비거리가 239.1야드(44위)에 불과했다는 게 모든 걸 말해준다.
이랬던 KLPGA투어 흐름이 최근 들어 바뀌고 있다. 지난주 최대 300야드에 이르는 ‘초장타’로 E1 채리티오픈을 거머쥔 방신실(19)에 이어 신예 최예본(20)도 260야드가 넘는 장타를 앞세워 이번주 롯데오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서다. 2일 인천 베어즈베스트 청라GC에서 열린 롯데오픈 2라운드 10번홀(파5)에서 출발한 최예본은 중간합계 7언더파를 쳐 공동 4위에 랭크됐다.
골프업계에선 지난해 윤이나(20)에 이어 올 들어서도 장타자가 잇따라 등장하자 KLPGA의 코스 공략 트렌드가 바뀌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통상 페어웨이 안착률과 그린 적중률은 비례한다. 잔디가 짧은 페어웨이에서 공을 쳐야 그린 위에 공을 세울 확률이 높아져서다.
방신실과 최예본의 기록지를 보면 이런 상식은 옛말이다. 방신실과 최예본의 페어웨이 안착률은 각각 115위(61.9%)와 107위(63.9%)인데, 그린 적중률은 각각 1위(79.6%)와 13위(72.6%)로 최상위권에 있다. 드라이버 샷을 세게 치다 보니 남들보다 자주 러프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세컨드 샷으로 그린에 착착 올린다는 얘기다.
전형적인 밤앤드가우지 전략이다. 올 시즌 드라이브 비거리 1위는 방신실(259.6야드)이고, 최예본은 5위(251.1야드)다. 지난 1일 최예본이 보여준 코스 공략법도 밤앤드가우지였다. 그는 이날 페어웨이 안착률은 78.5%로 중위권이었지만, 그린 적중률은 94.4%에 달했다.국내 여자 골프에서 밤앤드가우지의 원조는 박성현(30)이다. KLPGA투어에서 7승을 거둔 2016년, 그의 페어웨이 안착률은 124위(67.5%)였지만 그린적중률은 1위(79.7%)였다. 이후 끊겼던 ‘장타 여왕’의 맥을 지난해 윤이나가 넘겨받았지만, ‘오구 플레이’에 대한 징계로 필드에서 잠시 떠났다. 지난해 윤이나의 페어웨이 안착률은 93위(65.2%)에 머물렀지만 그린 적중률은 1위(79.6%)였다.
‘장타 전쟁’이 벌어지면서 KLPGA투어의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시청률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난주 E1 채리티오픈 최종라운드에서 방신실이 우승을 다투던 순간 최고 시청률은 1.017%(닐슨코리아 수도권 기준)에 달했다. 이 대회 생중계 평균 시청률도 0.437%(전국 기준)를 기록해 올해 평균(0.350%)을 크게 웃돌았다.
최예본은 이날 샷 난조 속에서도 장타를 앞세워 타수를 지키며 우승 경쟁을 이어갔다. 선두에는 이날 코스 레코드 타이기록을 세운 정윤지(23)가 이름을 올렸다. 정윤지는 버디 9개를 잡는 동안 보기를 1개로 막으며 8언더파 64타를 쳤다. 중간합계 11언더파 133타로 선두로 올라섰다. 8언더파 64타는 지난해 이예원 등이 1라운드에서 쳤던 코스 레코드 타이기록이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