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이 두둑한 투자자들이 있다. 돈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위험을 감수한다. 주식, 채권, 파생상품,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는 그런 전설적인 이야기 혹은 ‘미쳤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책으로도, 영화로도 많이 나왔다.
그런데 원자재 트레이더는 그들을 한참 넘어선다. 전쟁이 벌어진 분쟁 지역에 날아가 반군과 거래하는가 하면, 소련 붕괴 후 이권 다툼으로 사람이 죽어나갈 때도 꽁무니를 빼지 않고 돈을 좇는다. 독재자들과 호형호제하고, 서방 정부의 제재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 북한과도 거래하는 게 이들이다.
이런 모습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많은 회사가 비상장사다. 경영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언론과의 접촉도 피한다. 주식시장의 누군가처럼 자서전을 써서 떠벌리지도 않는다.
<얼굴 없는 중개자들>은 원자재 트레이더의 세계에 빛을 비추는 흔치 않은 책이다. 저자들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 블룸버그에서 20년 넘게 원자재 시장만 파고든 원자재 전문 저널리스트다. 수많은 취재와 인터뷰, 비밀문서 분석을 통해 원자재 시장과 중개자들의 민낯을 공개한다.
부패하고 탐욕스럽지만 그들을 ‘악’으로 치부할 순 없다. 책은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움직인다. 이들이 현대 경제라는 톱니바퀴의 필수적 톱니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이 없다면 주유소엔 기름이 떨어지고 공장이 멈추며 빵집은 밀가루가 없어 빵을 만들지 못한다.”
영향력은 경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미국 제재를 피해 석유를 수출할 때 그들의 조용한 도움이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설탕과 석유를 맞바꾸며 쿠바 경제를 지탱했다. 러시아 국영회사 로스네프트 사장이자 푸틴의 절친인 이고리 세친이 급히 100억달러가 필요했을 때 도움을 요청한 상대도 원자재 트레이더였다.
원자재 중개의 역사는 길다. 하지만 지금의 틀이 잡힌 건 1960~1970년대부터다. 중동 국가들이 석유 자원을 국유화하면서 ‘세븐 시스터즈’라고 불렸던 세계 7대 석유회사의 시장 장악력이 약해졌을 때다. 유전부터 주유소까지 단일 기업의 공급망에 예속됐던 석유가 자유롭게 거래되자 유가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산유국에서 원유를 받아 세계 시장에 판다면 큰돈을 벌 수 있을 터였다. 그 기회를 포착한 이가 필리프브러더스에서 트레이더로 일한 마크 리치였다. 1973년 봄 그는 이란 국영석유공사로부터 배럴당 5달러에 석유 약 750만 배럴을 사들였다. 시장가는 배럴당 3.29달러였지만 유가가 오를 거란 확신이 있었다. 회사가 뒤집어졌다. 무모한 베팅이라고 질책했다. 상부의 압력에 리치는 5달러보다 조금 높은 가격에 물량을 털어버렸다. 그 후 ‘1차 석유 파동’이 터졌고 10월 유가는 배럴당 11.58달러로 치솟았다.
리치가 독립해 세운 마크리치앤드코는 원자재 중개업계에 ‘대부’격인 회사다. 훗날 이름을 글렌코어로 바꾼다. 마크리치앤드코 트레이더 일부는 독립해 1993년 트라피구라를 세웠다. 금속과 석유 중개 세계 2위 회사다. 세계 1위 석유 중개업체 비톨, 곡물 중개 시장의 강자 카길도 있다.
글렌코어는 2011년 주식시장에 상장했는데, 이 덕분에 베일에 싸여 있던 업계의 많은 부분이 드러났다. 당시 투자설명서에 따르면 글렌코어는 세계 아연과 구리 중개 물량의 절반 이상, 석탄 수출의 25%, 보리 수출의 25%를 차지했다. 한 업체가 원자재 시장에서 그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에 이목이 쏠렸다. 다른 업체들이 더욱 노출을 꺼리는 계기가 됐다.
원자재 중개업체들이 최강은 아니다. 점점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원자재 시장의 정보가 투명해지고 선물옵션 등 금융화가 진행된 결과다. 월스트리트 투자은행이나 헤지펀드, 주하이전룽 같은 중국 업체가 경쟁자다. 한층 강해진 미국의 제재도 활동을 제약한다.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페이퍼컴퍼니를 세우는 것만으로는 미국 정부의 추적을 피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눈을 뜨게 만드는 책이다. 웬만한 영화보다 재미있다. 요즘 영화관에서 혹은 OTT에서 볼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이 대안이 될 수 있겠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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