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수십 명의 소리가 하나로 모여드는 응집력과 설득력을 갖춘 음악적 흐름, 지휘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한 통일된 방향성은 악단을 향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지난 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2023 교향악축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공연 얘기다.
오후 5시. 지난해부터 국립심포니 예술감독을 맡아 온 다비트 라일란트(사진)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오케스트라 뒤로 걸어 나왔다. 첫 작품은 예술의전당 위촉 창작곡인 이본의 ‘Cusco(쿠스코)? Cusco!’였다. 정반합(正反合)의 원리를 소재로 한 이 곡에서는 기존 선율과 그에 반대되는 선율, 기존 방향과 이를 거스르는 방향, 협화음과 이를 등지는 불협화음을 넘나들면서 ‘정(正)’에 도달하려는 음악적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다.
이어 독일 명문 악단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맡고 있는 실력파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이 등장했다. 그가 택한 작품은 독일 낭만주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대표작 중 하나인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김수연은 시작부터 특유의 우아한 음색과 섬세한 보잉(활 긋기)으로 브루흐의 짙은 애수를 펼쳐냈다. 물리적인 힘을 가하기보다는 비브라토의 양과 속도, 보잉의 길이를 긴밀하게 조절하면서 때론 도발적인 선율로 때론 애잔한 음색으로 작품의 다채로운 매력을 살려냈다. 정확한 터치와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게 연주하는 기법)으로 극적인 악상을 펼쳐내다가도 돌연 소리를 줄여 아련한 서정을 살려내는 연주에서는 노련함을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 작품은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 보헤미아 민족적 색채가 짙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드보르자크의 전원교향곡’으로도 불리는 곡이다. 시작은 약간 불안했다. 관악기가 다소 거칠고 직선적인 음색으로 선율을 뽑아내면서 드보르자크 특유의 목가적인 악상과 괴리감을 만들어냈다. 음정도 흔들렸다. 그러나 잠시였다. 라일란트가 선율의 진행을 세밀하게 조율해가며 행진곡풍의 역동감을 살려내자 금세 소리가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각 악기군의 명도와 악상을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작품 특유의 풍성한 색채를 펼쳐냈다.
현악기는 정제된 음색과 제한된 음량으로 기꺼이 후경을 맡다가도 금세 명료한 음색과 호쾌한 악상으로 전경에 자리하면서 작품의 입체감을 살려냈다. 선명한 악상 대비와 균형미는 전체 악곡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났다. 4악장에서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모든 악기군이 층을 이루며 쌓아가는 응축된 소리와 음악적 표현을 증폭시키면서 만들어내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청중의 환호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라일란트의 열정과 그를 향한 악단의 신뢰가 만들어낸 조화로운 연주였다. 1년 넘게 라일란트와 악단이 고군분투하며 이뤄온 단단한 음악 세계는 이제야 그 싹을 내보인 듯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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