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동 달래기에 나섰다. 미국 내 외교·안보 수장들이 잇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최고 실권자를 만난데 이어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협력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전 철수 이후 중동 내 영향력이 커진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한편 급변하는 중동 정세 속에서 미국의 입지를 회복하려는 행보로 분석된다. 러시아와 이란도 세를 과시하며 미국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블링컨 장관은 개회사를 통해 "미국은 이 지역(중동)에 계속 머물 것"이라며 "우리는 여러분과 협력 관계를 맺는데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GCC는 더 안정적이고 안전하며 더욱 번영하는 중동에 대한 미국 비전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블링컨 장관의 이런 발언은 중동에서 힘을 키우고 있는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은 조 바이든 행정부 들어 미국이 중동에서 인도·태평양 지역과 유럽으로 외교 중심 축을 이동한 틈을 타 중동 지역에 공을 들여왔다.
중국은 특히 아랍의 맹주 국가인 사우디와의 협력을 강화했다. 사우디 원유 수입량을 늘리는 대신 중국 위안화 결제비율을 늘린 게 대표적 예다. 중국은 올 3월에 앙숙 관계인 사우디와 이란이 외교 관계를 7년 만에 정상화하는데 중재 역할을 했다.
반면 미국과 사우디 관계는 2018년 10월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 이후 틀어졌다. 바이든 행정부가 카슈끄지 암살 배후로 사우디를 지목하면서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사우디는 미국의 증산 요구를 무시하는 등 미국과 사우디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런 상황을 의식해 블링컨 장관은 이번 중동 방문에서 사우디와 관계개선에 힘썼다. 전날 무함마드 사우디 왕세자를 1시간40분간 만나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외교 정상화 등에 논의했다. 지난달 7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빈살만 왕세자를 만난 지 한 달 만이다.
이날 블링컨 장관은 파이살 빈 파르한 사우디 외교장관과 양자 회담을 했다. 미 국무부는 "두 장관이 테러에 맞서고 중동의 안정 등을 위해 협력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전했다.
블링컨 장관은 중동 지역의 현안을 푸는데 협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예맨과 수단 내 분쟁을 하루빨리 종식시키고 시리아인들의 열망을 충족하는 정치적 해결책을 찾자"고 촉구했다.
미국이 중동 외교를 강화하자 러시아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이날 곧바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빈살만 왕세자와 전화통화하며 양국의 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크렘린궁은 보도자료를 통해 "양측이 원유 수급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시의적절하고 효율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OPEC+ 공조 체계를 높이 평가했다"고 전했다. OPEC+는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들의 협의체다.
하지만 지난 4일 회의에서 사우디만 다음달부터 감산하기로 결정해 사우디와 러시아 관계에 균열이 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이에 대해 크렘린궁은 "국제 에너지 시장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문제를 깊이 있게 검토하고 양국 협력 문제를 논의했다"며 양국 관계 이상설을 일축했다.
이란도 미국을 견제했다.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미국과 각을 세우고 있는 중남미 3개국 정상들을 만나기로 했다.
이란 국영 IRNA 통신에 따르면 라이시 대통령이 오는 11일 테헤란을 출발해 쿠바와 니카라과, 베네수엘라를 차례로 방문할 예정이다. 3개국 모두 좌파 정부가 집권하고 있으며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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