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사상 최고가 갱신한 펄프
중국 종이 소비량 줄어드는 등 경기침체 조짐에 시세 급락
종이의 원료인 펄프 가격이 올들어 35%이상 하락했다. 펄프 가격은 작년 하반기엔 코로나19 리오프닝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물류대란으로 연초 대비 40% 급등해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최근 물류 대란이 진정되고 중국의 경기 하락으로 수요가 감소하면서 가격이 떨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펄프 가격은 수요 측면 뿐만 아니라 공급의 변수도 중요하다. 지금도 지속되는 캐나다 퀘백주의 초대형 산불로 인한 여파가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펄프 가격은 화장지, 책값 등 생활 필수품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한솔제지와 무림페이퍼와 같은 제지 기업의 실적은 물론 신문사와 중소 출판·인쇄업체 등의 원가에 반영된다. 한국에선 무림P&P 한 곳만 펄프를 생산하며, 대부분 물량을 해외에서 수입힌다.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중국의 경기가 지난해부터 하강한 것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은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펄프의 3분의 1이상을 빨아들인다. 브라질 펄프 기업 스자노가 중국과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를 추진할 정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022년 중국의 종이·판지 소비는 전년 대비 1.9% 감소한 1억2403만?으로 4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선명한 컬러 인쇄가 가능해 전단지와 카탈로그 등에 쓰이는 도공지는 14.2% 감소한 500만?에 그쳤다. 경기가 냉각된 데다 패션 잡지 등의 전자화가 진행되고, 생방송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라이브커머스'가 빠르게 보급되는 등의 환경 변화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서적 등에 사용하는 비도공지(비코팅지) 소비 역시 전년 대비 6.4% 적은 1678만t으로 3년 만에 감소했다.
두꺼운 종이인 판지의 경우 과자 상자 등에 쓰는 백판지 역시 3.4% 감소한 1379만t의 소비량을 기록했고, 골판지 표면에 쓰는 원지 '라이너'는 1.2% 감소한 3159만t에 머물렀다. 경제 활동의 축소로 기업 간 거래가 줄어, 포장 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미국과 유럽 경기 둔화로 가전제품 등의 수출이 정체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유일하게 화장실 종이 등 생활용지만 1.2% 증가한 1059만t을 썼다.
반면 중국의 지난해 종이·판지 생산량은 전년 대비 2.6% 증가한 1억2425만t으로 늘어 재고물량이 쌓인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최대 제지업체 구룡지업(Nine Dragons Paper)의 지난해 하반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0% 가까이 감소했다.
LA타임스는 지난해 펄프값 급등의 원인이 미국 주택시장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금리 상승으로 북미 주택 건설 붐이 꺼지면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州) 목재 기업의 3분의 1 가량이 손을 놓아 펄프 생산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는 분석이다. LA타임스는 2021년 여름부터 불과 1년여 만에 화장지 값이 약 20% 오른 원인에 대해 "1년만에 60% 가량 폭락한 목재 선물 가격은 목재 공장 부산물에 의존하는 전 세계 제지 공급망에 파문을 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지난달부터 캐나다 퀘벡주를 중심으로 400여곳에 산불이 발생해 남한 면적의 3분의 1이 넘는 3만8000㎢ 규모의 산림이 불에 탔고, 아직도 진화작업이 한창이다. 대형 자연재해로 올해 상반기에 내렸던 펄프 가격 다시 오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불에 탄 캐나다 퀘백 산림지대는 전세계 펄프 공급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다만 유럽산 펄프 생산이 늘어 예전처럼 가격이 급등하진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원자재 정보업체 패스트마켓 패트릭 캐버노 연구원은 "스웨덴과 핀란드 목재업체들이 하반기까지 연간 100만t의 생산 능력을 추가 확대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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