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클래식 음악계가 ‘새로운 세대의 마에스트라(여성 지휘자)’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한국인이 있다.
2017년부터 노르웨이 정상급 악단인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를 맡은 데 이어 지난해 9월 독일 명문 함부르크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 자리까지 꿰찬 장한나(41)다. 1994년 12세 나이로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첼로 신동’의 이름 앞에는 이제 첼리스트보다 지휘자란 호칭이 더 자주 붙는다. 그런 장한나가 오스트리아 명문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11일 광주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대구 수성아트피아(12일), 부천아트센터(13일), 롯데콘서트홀(14일)에서 나흘 연속 청중과 만난다.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에로이카)’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브루스 리우 협연) 등을 연주한다.
공연을 앞둔 지난 9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장한나에겐 긴장감보다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는 “빈 심포니와는 긴 연습 시간이나 복잡한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며 “우리에겐 서로의 몸짓과 호흡에 순간순간 반응하며 깊은 음악적 소통을 이뤄낸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한나와 빈 심포니는 지난해 내한공연에서 합을 맞춘 바 있다. 장한나는 이어 “빈 심포니가 추구하는 베토벤과 내가 오래 탐구해온 베토벤이 만나 거대한 스파크를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베토벤 교향곡 3번은 청력 상실에 따른 극심한 고통으로 유서까지 썼던 그가 좌절을 딛고 일어나 작곡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불태운 작품이다. 장한나는 “이 곡에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택해 내 안에 있는 모든 영감이 소진될 때까지 음악에 헌신하겠다’는 베토벤의 강인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고 했다.
“오케스트라가 표현할 수 있는 수천만 가지 감정이 음표 하나하나에 녹아 있어요. 그의 음악적 언어를 정교하게 풀어내 그야말로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빨간 피가 들끓는 베토벤의 열정을 온전히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장한나가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2007년이지만, 지휘자를 꿈꾼 건 대학 진학 무렵인 2000년 전후였다.
“항상 고민했어요. ‘어떻게 해야 음악적 영양분을 더 많이 빨아들일 수 있을까’. 첼로 레퍼토리로는 제 욕심을 다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교향곡 악보를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음표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거예요. 작곡가의 숨결과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했죠. 그때 ‘지휘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운명처럼요.”
장한나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매일 집에 틀어박혀 악보 공부에 매달린다. “악보와 씨름하다 보면 10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수억만 개의 음표 하나하나마다 ‘베토벤이 너를 왜 여기에 썼을까, 왜 여기선 작은 소리가 필요할까’ 등의 물음을 던지고 나만의 답을 찾아나가니까요. 이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만을 의미하진 않아요. 매일 제 영혼과 생명력을 쏟아붓는다는 마음으로 임하죠. 아무리 힘들어도 지휘 공부만큼은 절대 소홀할 수가 없어요.”
그의 삶에서 음악을 뺀 시간이 있을까. “음악가에겐 퇴근이 없습니다. 집에 있을 때도 결국 음악을 공부하죠. 이런 생활에 가끔은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나기도 해요. 그래도 어김없이 악보를 들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거라면 절대 이렇게 못 하죠. 나의 최선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제일 잘 알잖아요. 음악가라면 적어도 자신이 만족할 만큼은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한나에게 지휘자로서의 목표를 물었다.
“세계 최정상 악단의 포디엄에 서는 걸 마다할 지휘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조금 더 본질적인 걸 추구합니다. 음악에서 매일 새로운 걸 느끼고, 새로운 걸 보고, 새로운 걸 들을 줄 아는 지휘자가 되는 거죠. 음표에 담긴 수천만 가지 감정을 찾아내고, 이걸 살아 숨 쉬는 음악으로 펼쳐낼 수 있다면, 하루하루가 너무 신날 것 같아요.”
김수현/조동균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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