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떨어뜨린 듯한 아이스크림이 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있다. 이걸 찍은 사진을 가까이 보려고 다가간 관람객의 얼굴엔 놀라움이 한가득이다. 떨어진 게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꽃잎과 흙이어서다.
눈을 의심케 하는 사진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과와 바나나의 일부가 모자이크로 가려져 있는 듯한 작품은 자세히 보면 과일을 정사각형 모양으로 조각낸 뒤 쌓아 올린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갈변한 조각들이 더욱 사실적인 모자이크를 만들어낸다.
서울 부암동에 자리잡은 석파정 서울미술관은 이렇게 ‘자연이 만든 착시현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일본 광고계의 천재’로 불리는 아트디렉터 요시다 유니(43·사진)의 작품이다. 요시다는 광고뿐 아니라 영상,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아티스트다.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해외 첫 개인전 ‘알케미(Alchemy·연금술)’를 열고 15년간 작업해온 작품 230여 점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는 개막 전부터 국내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얼리버드 티켓만 1만 장 넘게 팔렸을 정도다. 올초 요시다가 만든 일본 드라마 ‘엘피스’ 포스터가 SNS에서 알려진 게 계기였다.
평범한 포스터가 화제의 중심에 선 건 등장인물 주변에 지직거리는 ‘글리치’ 효과를 컴퓨터그래픽(CG)이 아니라 100% 수작업으로 구현했기 때문. 일반적으로 글리치 효과는 CG로 만들지만 요시다는 CG 대신 손을 썼다. 검은색, 회색, 살구색 서류철을 하나씩 엇갈리게 쌓아 마치 특수효과 같은 연출을 완성했다.
요시다의 작품이 단순한 광고, 그 이상인 이유다. 그는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을 재조합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바꾼다. 그 안에는 요시다의 손길이 하나하나 숨어 있다. 사과와 바나나 모자이크 작품인 ‘레이어드(Layered)’는 요시다가 직접 과일 조각을 핀셋으로 하나하나 쌓아 올렸다. CG를 전혀 쓰지 않고도 마치 조작된 듯한 이미지 같은 인상을 준다.
요시다는 그 이유에 대해 지난달 말 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CG를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사람의 손길로 만든 작품에는 따뜻한 열정이 담긴다고 믿어요. 손끝으로 세세하게 만지고 조율하는 과정 속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손으로 하는 게 재밌잖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현미경을 끼고 살았어요. 현미경을 통해 사물의 이면을 보는 게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이런 습관이 현실 속에서 판타지를 찾는 작업으로 이어진 거죠.”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선보인 ‘플레잉 카드’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전시장 끝 쪽에 가면 트럼프 카드 57점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어릴 적부터 카드게임을 즐긴 요시다가 ‘아날로그 수작업’으로 제작한 카드 세트다. 자세히 보면 ‘킹 카드’는 커피잔, 딸기, 크래커로 만들었고, 클로버 카드는 가르마를 탄 검은 머리를 위에서 찍은 모습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트럼프 카드를 그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순간의 정교함’이 생명인 작업이다 보니 전시작 대부분은 사진이다. 스튜디오에서 완벽하게 구현해놓고 그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했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설치작품은 바나나가 흘러내리는 듯한 모형이다. 요시다는 “비록 사진이긴 하지만 휴대폰 화면을 통해 보는 것보다 더 크고 자세하게 디테일을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9월 24일까지 열린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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