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독일의 위대한 저력을 성찰해야 하는 이유

입력 2023-06-18 18:13   수정 2023-06-19 00:15

대립과 투쟁의 정치를 타협과 상생의 정치로 치환해 국가 재건에 성공한 나라가 있다. 바로 패전국 독일이다. 독일의 기적 같은 부활의 배경에는 타협의 정치와 경륜 있는 총리의 역할이 있었다.

패전으로 무너진 독일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으로 ‘전후 구축된 정치 시스템’과 ‘실용적 총리의 리더십’을 꼽는 분석이 많다. 1949년 서독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총리에 콘라트 아데나워 전 쾰른 시장이 선임됐다. 그는 1963년 퇴임할 때까지 강력한 카리스마로 국가 재건을 주도했다. 친미 외교, 프랑스와의 화해,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부흥, 나치 범죄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죄 등으로 국가 위상을 끌어올렸다. 헨리 키신저 박사는 그의 저서 <리더십>에서 이를 ‘겸손의 전략(strategy of humility)’으로 규정했다.

이후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에 이르기까지 독일 총리들은 국가 단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성숙된 정치 리더십을 보여줬다. 2003년 공영 방송 ZDF는 가장 위대한 독일인 100인을 선정했는데 아데나워가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빌리 브란트, 헬무트 콜, 헬무트 슈미트,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 5인의 총리가 포함됐다. 직무에의 헌신, 질박한 라이프 스타일, 양자택일이 아니라 중도실용적 해법 추구 등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은 비결이었다.

총리의 장기 재임이 정치적 안정과 정책 일관성을 담보했다. 1949~2021년 총리의 평균 재임 기간은 9년이었다. 메르켈과 콜 총리는 16년, 아데나워는 14년을 집권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평균 8년, 재선 미국 대통령의 임기 8년을 압도한다. 건설적 총리 불신임 투표 제도로 인해 잦은 총리 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1982년 슈미트 총리가 콜로 교체된 것이 유일한 사례다. 1949년 건국 후 한 번의 예외 없이 연정(聯政·연립정부)이 수립됐다. 양대 정당인 기민당과 사민당 사이의 대연정도 1966년, 2005년, 2013년, 2017년 등 네 번이나 이뤄졌다. 메르켈 총리는 세 번의 대연정을 이끌면서 금융위기, 난민 유입,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 중국의 굴기에 잘 대처했다. 5% 득표율 조항으로 군소 정당의 연방의회 진출을 불허하고 연정 구성을 용이하게 했다.

독일의 국가 이미지도 크게 개선됐다. 유럽 경제의 엔진,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인 포용성, 소수 인종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대함으로 존경받는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퓰리처상을 받은 저명 칼럼니스트 조지 윌은 “오늘날의 독일은 세상이 봐왔던 최고의 독일”이라고 극찬했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계속됐다. 1970년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1985년 폰 바이체커 대통령은 나치 항복 40주년 연설에서 “우리는 과거와 타협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독일 특유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규제 없는 자본주의’를 두 번의 세계대전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로 인식한다. 그래서 ‘책임감 있는 자본주의’를 추구한다. 통일 이후 과도한 동독 지원 등으로 경제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심화하자 하르츠 노동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유럽의 병자’에서 ‘유럽의 성장 엔진’으로 탈바꿈했다. 미텔슈탄트(강소기업)로 대변되는 작지만 강한 제조업이 독일 경제의 심장이다. 밀레 세탁기, 파버 카스텔 연필 등이 대표적이다. 학교를 졸업한 사람의 절반 정도가 직업훈련을 받는다. 기업도 단기 이익보다는 지속 발전에 우선순위를 두는 장기주의 관점의 경영 행태를 보여준다.

건전 재정 운영이 독일 경제의 마지막 보루다. 재정 곳간을 지키려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책임 의식이 강하다. 일본은 국가채무비율이 260%대로 재정불량국가로서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독일은 안정된 재원으로 코로나19 대응에 과감히 재정을 투입해 경제를 살렸다.

독일은 사회적 자본이 탄탄한 나라다. 괴테, 실러, 칸트, 헤겔 같은 인류문화를 살찌게 한 문화예술인의 고향이다. 예술가의 공적 역할도 활발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하인리히 뵐, 귄터 그라스는 ‘20세기 유럽의 양심’ 소리를 들었다.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대한민국은 독일의 국가경영전략, 정치적 안정, 재정 건전성, 사회적 결속을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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