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점화'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입력 2023-06-20 17:40   수정 2023-07-25 16:55


2019년 11월 23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의 ‘점화(點畵)’ 연작 중 하나인 ‘우주(Universe)’가 한 수집가에게 131억8000만원에 낙찰되는 찰나 경매장 여기저기에서 감탄이 쏟아지며 한순간 술렁거렸다. 그것은 추상 회화의 변방인 한국에서 마크 로스코에 견줄 만한 추상 회화의 거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점화’가 한국 현대 회화의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고쳐 쓰리라는 낙관적 기대는 진작부터 있었다. 2016년 ‘노란색 전면점화’가 63억원, 이듬해 ‘고요(Tranquillity)’가 65억원, 2018년 ‘붉은색 전면점화’가 85억원에 잇달아 낙찰되면서 한국 미술품 최고가를 고쳐 써왔기 때문이다.
변방에서 탄생한 추상 회화 거장
며칠 전 경기 용인의 호암미술관에 들러 ‘김환기 전’을 보고 돌아왔다. 평일임에도 전시장은 관람 인파로 넘쳐났다. 이번 전시회는 김환기의 대표작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2층 전시관에는 ‘론도’ ‘산’ ‘산월’ ‘야상곡’ 같은 초기 수작들이 걸리고, 1층 전시관에는 미국 뉴욕 시절의 ‘점화’ 연작이 전시됐다. 2층 전시관을 돌아보고 계단을 내려와 1층 전시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대작들에 압도됐다. 벅찬 감흥과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은 그것이 다른 무엇에서 경험할 수 없는 예술의 경이와 신비가 촉발시키는 에피파니의 찰나였음을 깨쳐줬다.

김환기는 1963년 록펠러재단의 기금을 받으며 뉴욕에 둥지를 틀고 숨을 거둘 때까지 머물러 작업에 몰두했다. 국민소득 100달러 안팎이던 저개발국가인 동아시아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중년 화가에게 뉴욕은 무엇이었을까? 작가 E B 화이트는 뉴욕이 “예술과 상업과 스포츠와 종교와 엔터테인먼트와 금융의 응축체이고,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고독이라는 선물과 사생활이라는 선물을 선사한다”고 썼다.

뉴욕은 세계 도처에서 몰려온 젊은 배우들, 시인들, 발레리나들, 화가들, 기자들로 북적이는 ‘원형경기장’이나 다름없다. 예술가들은 재능과 자본이 밀집된 메가시티에서 마치 부나방들이 불길로 뛰어드는 것 같이 몰려와 성공과 실패를 겪고, 저마다 영광의 순간과 무용담을 지어내는 것이다.
반추상에서 완전한 추상 세계로
김환기는 인생의 쾌락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고행을 일삼는 수행자처럼 그림에 몰입한다. 그는 일기에서 죽자사자 그린다고 했다. 가족과 벗들에게서 외따로 떨어져 외로움을 견디며 종일 일하고 밤에도 그림 그리기를 쉬지 않았다. 그림에 전념하느라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예술에서 거저 얻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제 생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쓰며 사물과 세계를 탐색하고 한 번도 가지 않은 낯선 영역으로 두려움 없이 성큼 나아가는 게 예술가들이다.

예술이건 기업이건 인습에 갇혀 자기 복제나 되풀이하거나, 익숙한 기술에 안주하는 태도는 사망선고를 받는다. 예술가이건 기업가이건 실험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미 성취한 것을 깨고 부수는 용기를 통해 창조적 혁신으로 거듭나야 한다. 1965년 1월 10일, 김환기는 “종일 제작. 점화를 전부 뭉개고 다시 시작”이라고 적는데, 일기에 이런 구절은 드물지 않다. 그는 완성돼 가는 그림을 뭉개고 부숴버린 뒤 다시 시도하기를 거듭한다.

김환기는 1970년 한국일보사에서 시행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출품해 대상을 거머쥐는데, 그림 제목은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에서 빌려왔다. 푸른색 기조의 화폭에 벌집 같은 사각형이 이어지고, 그 사각형 안에 점들을 찍은 ‘점화’가 마침내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난다. 그 점들은 닮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화면 가득히 점을 찍으며 화가는 무슨 생각에 빠졌을까?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의 고독 속에서 서울의 벗들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되새김질하지 않았을까?

그는 초기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달, 산, 구름, 학, 항아리, 여인 따위의 의고적 소재에서 벗어나 ‘점화’에 이르러 반추상에서 완전한 추상 세계로 들어선다. 1965년 1월 24일 일기에 “선과 점을 더 밀고 가 보자”고 다짐하는데, 선과 점은 구상적인 것들이 품은 일체의 군더더기를 깎아낸 가장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요소들이다.

화가는 죽음이 다가옴을 직감하며 자신이 평생 그림에 갇혀 산 ‘종신수’임을 깨닫는다. 한국이 낳은 추상 회화의 종신수는 1974년 7월 7일에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지만 회생하지 못했다. 김환기가 숨을 거둔 것은 7월 25일 오전 9시40분께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1930년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현대 회화를 공부하고 돌아온다. 그 뒤 아방가르드의 전위로 활동을 펼치다가 프랑스 파리를 거쳐 뉴욕에 정착한 지 11년 만에 뉴욕주 포트체스터의 유나이티드병원에서 화가로서의 생을 마치고, 뉴욕주 발할라 산마루의 켄시코 묘지에 조용히 묻혔다.
경험하기 힘든 숭고한 법열감
‘점화’는 단순함에서 우주적 심연을 찾는 실험의 결과물이다. 나는 그 ‘점화’들 앞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나? 그 ‘점화’들 앞에서 내 심장은 펄럭이고, 감정은 비등점으로 끓어오르고,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한 화가가 생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며 일념으로 도달하고자 한 추상 회화의 정점과 마주해서 느낀 것은 감히 경험하기 힘든 저 너머의 숭고함이 주는 법열감과 아름다움이 일으킨 벅차오른 감흥 때문이다. 나는 추상 회화에 헌신하고 고투한 한 화가가 찾은 미의 황홀경, 삶의 관조적 찬가, 우주적 환희의 철학에 감응했다.

예술가의 공훈은 세계를 혁신하는 데 있다. 그들은 우리 상상을 자극해 오래된 것을 새롭게 보게 하고,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하며, 섬광처럼 번뜩이는 영감과 쇄신의 계기를 선물한다. 그런 예술가를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면 기필코 낡은 인간에서 새로운 품성의 인간으로 다시 빚어지는 경이를 맞을 수 있다. 이번 주말에는 일상범백사를 뒤로 밀쳐두고 ‘김환기 전’을 보러 미술관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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