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원정출산 막는 건 '좋은 정치'

입력 2023-06-23 17:39   수정 2023-06-24 00:23

2015년 대만을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항공기 안에서 대만 산모의 양수가 터졌다. 다행히 무사히 딸을 낳았다. 분만 중에 그는 수차례 “지금 우리가 미국 영공 내에 있나요?”라고 물었다. 의도는 분명했다. 미국 영공을 비행 중인 항공기에서 출생한 아이는 자동으로 시민권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 때문에 원정출산 사실이 들통났다. 딸은 미국 시민권을 얻었으나 대가는 컸다. 그는 아이를 놔둔 채 추방됐다. 항공사는 비행기가 산후조리 차 앵커리지로 우회한 데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최근 많은 러시아인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하고 있다. 작년에는 2만 명 이상이 입국했는데 다수는 출산을 앞둔 임신부였다. 러시아인은 비자 없이도 90일간 체류할 수 있다. 이 기간에 태어난 아이는 아르헨티나 국적을 취득하고 부모도 2년 안에 여권을 받을 수 있다.

팬데믹으로 닫혔던 항공기 여행이 회복됨에 따라 원정출산도 늘고 있다. 미국에서는 매년 3만 명 이상이 출산한다. 주로 중국, 대만, 나이지리아, 터키, 러시아, 브라질, 멕시코, 한국 여성들이 출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정출산이 가능한 이유는 자국 영토 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출생시민권(birthright citizenship)’ 제도 때문이다. 출생에 의한 국적 취득 방법은 속지주의(출생지주의·jus soli)와 속인주의(혈통주의·jus sanguinis)인데 한 원칙만을 고수하는 국가는 드물다. 대체로 한 원칙을 기본으로 하되 다른 원칙을 보충적으로 적용한다. 한국은 부모 양계 혈통주의를 취하되, 부모를 모르거나 부모 모두 국적이 없는 경우 출생자에게 한국 국적을 인정한다.

현재 30여 개국이 출생시민권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주로 미국,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 등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다. 이 나라들이 유럽인의 이민을 촉진하기 위해 이민자에게 우호적인 이민법을 제정한 것이 그 이유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행정명령을 통해 원정출산을 금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미국 출생인을 모두 시민으로 규정하는 수정헌법 제14조를 행정명령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2016년 대선 때도 같은 공약을 했으나 대통령 재임 시절 행정명령에 서명하지 않은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반(反)이민정책으로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정치적 의도다.

원정출산은 해당국에 의료, 교육, 복지 등 광범위한 경제적 부담을 지운다. 여권이 범죄인에게 악용된다는 점에서 안보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제재판소는 국적이 국가와 개인을 연결하는 법률적 고리로서 ‘진정한 유대’가 있어야 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경제난으로 원정출산에 대한 비판이 확산하면서 각국의 규제도 강해질 것이다. 이미 뉴질랜드는 국적법을 개정해 2006년 이후 뉴질랜드 원정출산은 불가능해졌다. 대다수 유럽 국가는 속인주의를 원칙적으로, 속지주의를 보충적으로 적용해 왔으나 광범위한 반이민 정서를 반영해 과거의 속인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한국의 원정출산 관행은 병역법 개정으로 줄긴 했지만 계속되고 있다. 한국 아동의 해외 입양과 원정출산은 국가의 불명예일 뿐 아니라 인구 정책에도 반한다. 그러나 해외여행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원정출산이 근절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알선업체들은 훨씬 큰 비용을 요구하고 법망을 빠져나갈 더욱 교묘한 방법을 찾을 것이다. 결국 미래세대에게 희망을 주는 ‘좋은 정치’만이 원정출산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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