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지(25)는 프로골퍼들 사이에서 ‘애서가’로 통한다. 어디를 가도 책 한두 권을 끼고 다닌다고 한다. 그런 그가 한 달 넘게 손에서 놓지 않은 책이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쓴 <자기만의 빛>이다. 백악관을 나온 뒤 상실감에 빠진 오바마 여사가 우연히 시작한 뜨개질로 안정을 찾는다는 대목이 그의 마음을 울렸다고 했다. 작고 사소한 일 하나로 일상을 회복했다는 그 글귀가 좋아서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오바마 여사의 뜨개질이 박민지에겐 ‘치마 입기’였다. 7년 전 프로골퍼가 된 뒤 바지만 고집하던 그는 이달 초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셀트리온 퀸즈마스터즈 대회에서 처음 치마를 입었다. 그리고 시즌 첫 승을 거뒀다. 지난 25일 경기 포천시 포천힐스CC에서 열린 BC카드·한경레이디스컵을 제패하며 올 시즌 첫 다승자로 등극했을 때도 치마를 입었다.
26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만난 박민지는 “치마가 스윙에 방해될까 봐 입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자신을 가둔 것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서 한번 입어봤더니 한결 편하고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젠 어떤 것으로도 나를 한정하지 않고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곳까지 달려보겠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잠시 무뎌졌던 ‘독기’가 다시 살아났다. 올 시즌 여덟 개 대회 만에 첫 승을 거뒀고, 한 달도 안 돼 우승을 추가했다. 박민지는 “18번째 우승이지만 여전히 첫 승처럼 짜릿하고 흥분된다”며 “매 대회, 첫 승을 갈구하던 신인 때처럼 우승이 욕심난다”고 말했다.
BC카드·한경레이디스컵은 박민지의 저력과 위상을 보여준 대회였다. 박민지는 최종 라운드에서 공동 선두그룹에 2타 뒤진 채 출발했는데도 대다수 전문가는 박민지의 우승을 예상했다. 공동 선두였던 이가영(24)과 리슈잉(20), 허다빈(25) 등 그보다 리더보드 앞에 있던 선수가 하나같이 가슴 터지는 압박감에 무너졌지만 박민지는 끄떡없었다. 박민지는 “3연속 버디를 한 경기 중반이 승부처였다”며 “우승 경쟁을 하던 선수들에게 ‘내가 다 따라잡았다’는 걸 알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그의 눈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 US여자오픈과 아문디 에비앙 챔피언십에 향해 있다. 지난해에도 BC카드·한경레이디스컵을 제패한 뒤 에비앙 챔피언십에 도전장을 냈다. 하지만 그때는 공동 37위를 기록하며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박민지는 “작년에는 국내 일정을 모두 소화한 뒤 비행기를 탄 탓에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다”며 “올해는 다르다. BC카드·한경레이디스컵에서 칩샷을 세 개나 성공하는 등 쇼트게임 자신감이 많이 올라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년에는 세계적인 선수들의 플레이를 구경하기 바빴지만 이번에는 그들에게 박민지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려주고 오겠다”고 다짐했다.
조희찬/조수영 기자 etwood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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