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잡아먹고 악마 숭배…'잘 나갔던 화가'는 왜 그렸나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3-07-01 08:12   수정 2023-07-01 09:05


여기, 세상에서 가장 섬뜩한 미술관이 있습니다.

미술관 문을 열면 맞은편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이 그림입니다. 괴물처럼 무시무시한 저 존재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 사투르누스(크로노스). 그는 “자식 때문에 몰락한다”는 예언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태어나는 족족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권력에 눈이 먼 아비가 자식을 먹는 그 끔찍한 광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훗날 사투르누스는 간신히 살아남은 아들 유피테르(제우스)에게 쫓겨나게 됩니다만, 이 끔찍한 그림에서는 그런 희망의 실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로 왼쪽에 걸려 있는 이 작품은 어떤가요. 검은 염소의 모습을 한 악마 주위에 마녀들이 모여 있습니다. 겁에 질린 것처럼 고개를 숙인 사람도, 입을 벌리고 황홀하게 악마를 바라보는 듯한 마녀도 있네요.


이곳에 걸린 섬뜩한 작품들을 그린 사람은 유럽 미술사에 손꼽히는 거장이자 스페인의 국민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 ‘왕의 화가’로 임명돼 한때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었던 그는 말년에 시골 별장에 은둔한 뒤, 이층집 벽면에 이런 그림들을 가득히 그렸습니다. 잘나가던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이렇게 무서운 그림들을 그리게 된 걸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그 이유를 추측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그의 삶을 알아야겠지요. 고야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야심 찬 시골뜨기, 궁정화가 되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가장 되고 싶어 하는 직업 중 하나가 웹툰 작가라고 합니다. 부와 인기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직업이라나요. 사실 그럴 수 있는 건 극소수의 최상위권 인기 작가뿐이고 현실에서는 어려움을 겪는 작가들이 훨씬 많지만, 아직 초등학생이니까 그런 걸 모를 수도 있지요.

중세 이후 유럽에서 궁정 화가라는 직업도 요즘의 인기 웹툰 작가와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되기는 어렵지만 일단 되고 나면 큰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스페인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고야도 궁정화가를 꿈꿨습니다. ‘나는 꼭 궁정 화가가 돼서 보란 듯이 성공할 거야.’ 어린 고야는 굳게 다짐했습니다.

고야는 어릴 때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왕립 미술학회에 두 번이나 가입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했고요. 하지만 그는 집념 어린 노력으로 궁정화가가 되는 계단을 한 걸음씩 올랐습니다. 궁정 화가로 일하던 고향 선배의 지원을 받기 위해 선배의 여동생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결혼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느새 일취월장한 그림 실력에 다방면의 노력이 겹치면서, 그의 주가는 날이 갈수록 올랐습니다. 30대에 들어 그는 마침내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합니다. 동료 화가들이 “초상화 공장을 운영하느냐”고 비아냥댔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요. 그 결과, 마침내 고야는 1789년 국왕 직속 화가로 임명되며 성공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고야가 친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이처럼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폐하와 함께하는 궁정 생활은 정말 황홀하다네. 살림도 정말 넉넉해졌지. 나는 요즘 멋진 전용 마차를 구입했다네….”

물론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고야는 격무에 시달렸습니다. 스페인의 상류층이라면 누구나 고야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갖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쏟아지는 주문을 처리하던 고야는 1793년 병을 크게 앓으며 청각 장애를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예술혼을 더욱 날카롭게 했습니다. 고야의 아들에 따르면 고야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그림을 가르친 스승은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자연, 그리고 청각 장애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스승은 청각 장애다.”
‘사망자만 100만명’…스페인 덮친 비극


하지만 고야는 점차 스페인 왕실에 환멸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4세는 무능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사람이었냐면, 자기 아내와 바람난 젊은 군인 고도이(1767~1851)를 아껴서 총리대신으로까지 임명할 정도였습니다. 고도이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였고, 왕비와 결탁해 스페인을 쥐락펴락하며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전 유럽을 휩쓸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1808년 스페인을 침략하게 됩니다. 부패한 왕실과 고도이에게 지쳐 있던 스페인 국민들은 처음에는 프랑스군을 환영했지만, 곧 이들이 침략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항을 시작합니다. 나폴레옹은 이를 강경하게 진압했습니다.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1808년 5월 3일, 프린시페피오 언덕의 학살’이 프랑스군의 잔혹한 진압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리고 6년간의 잔혹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이라는 게 원래 잔인한 일이지만, 이 전쟁은 유독 심했습니다. 강력한 프랑스군을 정면 상대하기 어려웠던 스페인 독립 세력은 민간인 사이에 숨어 있다가 ‘치고 빠지는’ 전술을 택했습니다. 널리 알려진 ‘게릴라전’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 것도 이 전쟁입니다.

프랑스군은 협력자를 색출한다며 잔혹 행위를 벌였고, 스페인 독립군도 보복을 위해 프랑스군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민간인이 잔인하게 희생됐습니다. 전쟁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통틀어 총 1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현실을 두 눈으로 목격한 고야는 남몰래 전쟁의 비참함과 프랑스군의 잔혹한 행위를 고발하는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다만 그는 궁정 화가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습니다. 처자식은 물론 형제자매들까지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1814년 스페인 독립 후 고야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다행히도 처벌은 면했습니다만, 이는 스페인 미술계에서 고야의 입지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됐습니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본 고야. 1819년 72세를 맞아 마드리드 교외 언덕에 위치한 농가를 사들인 후 은둔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집 벽에 4년간 자신 내면의 모든 어두운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훗날 이 집은 ‘귀머거리의 집’, 그림들은 ‘검은 그림’으로 불리며 고야를 대표하는 연작이 됩니다. 이 작품들은 지금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하나인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의 별도 전시실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래서,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고야는 이런 작품들을 남긴 이유에 대해 따로 설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중적으로는 “고야가 인간 세상에 절망했다”라거나 “미쳤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들의 인상이 워낙 강렬하고 충격적이어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그렸다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사실과 다른 점이 많습니다.

①고야는 미치지 않았다
‘검은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도 고야는 종종 일반적인 초상화 주문을 받아서 그렸습니다. 그는 평생 돈 관리에 철저해서, 1828년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궁정 화가로 받는 연금 관련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마드리드에 직접 다녀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런 그림들을 그렸을 때도 판단력에는 문제가 없었고 정신이 아주 맑았다는 얘깁니다.

②인간을 혐오하게 된 것도 아니다


1823년 고야는 마드리드 생활을 청산하고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고야는 “비록 귀도 들리지 않고 프랑스어도 못하는 데다 늙고 쇠약했지만, 일에 열중했고 가까운 이들에게 다정했으며 평온했다”고 합니다. 이때 남긴 작품 역시 인간 혐오와 거리가 멉니다. 자신을 돌봐주던 여성을 모델로 그린 이 작품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함께 조화롭고 부드러운 내면의 기운이 풍깁니다.

③고야는 뼛속까지 예술가였다
이때까지 그림을 쭉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고야의 화풍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평생 화풍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고야가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원천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가 80살 넘어 목탄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제목은 ‘지금도 나는 배운다’. 말 그대로 그는 평생 변화와 발전을 마다하지 않았던, 뼛속까지 예술가였습니다.


“평생 남들에게 보여주고 팔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화가가, 마침내 원 없이 내면을 쏟아내 자신만을 위한 작품을 그리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고야의 행적을 감안하면 ‘검은 그림’을 그린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해 보입니다. 실제로 고야는 작품을 그렸다는 사실조차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아서, ‘검은 그림’의 존재도 그가 죽고 난 뒤에야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고야가 왜 오늘날까지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지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야는 소년 시절부터 빛났던 화려한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외세에 부역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숭고한 독립운동가도 아니었고요. 난세를 살았지만 괜찮은 처세술 덕에 특별히 비극적인 일을 겪지도 않았고, 어떤 화파를 이끌며 추종자들을 모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한마디로 정리해서 알리기가 힘든 화가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혼에 그 누구보다 충실했고, 이를 위해 죽기 직전까지 배우고 변화했습니다. 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완벽한 존재가 아니고 때로는 추악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관성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걸 배우고, 창조하는 이상 인간은 몇 살이 됐든 끝없이 발전하는 존재라고, 고야의 삶과 작품들은 우리에게 전하는 듯 합니다.

이번주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우는, 알찬 휴식의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i>*(참고문헌) 이번 기사의 내용은 ‘저항하는 지성, 고야’(박홍규 지음, 푸른들녘), ‘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츠베탕 토도르프 지음, 류재화 옮김, 아모르문디), ‘고야’(새러 시먼스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아트), ‘붓으로 역사를 기록한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엘케 폰 라치프스키 지음, 노성두 옮김, 랜덤하우스), ‘고야, 영혼의 거울’(프란시스코 데 고야 지음, 이은희,최지영 옮김, 다빈치), ‘고야 황금과 피의 화가’(자닌 바티클 지음, 송은경 옮김, 시공사), ‘고야’(로제-마리&라이너 하겐 지음, 이민희 옮김, 타셴),‘고야 혼란의 역사를 기록하다’(줄리아노 세라피니 지음, 정지윤 옮김, 마로니에북스), ‘고야 검은 관능의 시선’(파올라 라펠리 지음, 박미훈 옮김, 마로니에북스)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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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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