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스’와 아무 상관 없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의 진리를 이렇게 한 줄로 요약했다. “변하지 않는 건 모든 게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사회를 이끄는 핵심 윤리도 예외는 아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자세, 이젠 조금 고쳐 잡을 때가 됐다. 부작용의 수위가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도를 넘는 징후는 여럿이다. 우선 교육 현장. 지나치게 부풀려진 불안이 소중한 아이들의 시간과 정신을 갈아 넣고 있다. 의대에 가지 않으면, 공무원이 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공포가 학교를 뒤덮었다. 이름도 섬찟한 ‘킬러 문항’ 논쟁은 그 파편이다. 걸음마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마저 영어학원에 내몰리는 세태는 어떻게 봐도 정상이 아니다. 앞줄이 일어서는 바람에 모든 사람이 서서 영화 관람을 하는 나라, 어이없는 대한민국 교육 현실이다.
투자의 세계도 과잉 불안이 잠식했다. ‘영끌’ ‘빚투’의 근원 역시 미래에 대한 과도한 불안과 걱정이다. 강아지 모양의 암호화폐에 뭉칫돈이 쏠리는 현상이나, 아파트에서 오피스텔로, 다시 빌라로 옮겨붙은 묻지마 투자 열풍이나 모두 같은 맥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건강이라고 예외일까? 전 국민이 다이어트 전사가 된 지 오래고, 유튜브엔 건강식에 대한 정보가 홍수를 이룬다. 전자파에 튀겨진다는 ‘사드 괴담’과 ‘뇌송송 구멍탁’ 여섯 글자에 휩쓸린 ‘광우병 소동’이 대다수 국민에게 먹혀든 것도 불안과 공포라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방사능 오염수 공포도 과학보다는 심리학에서 원인을 찾는 게 빠르다.
이 모든 부작용의 총체적 지표가 출산율이다. 0.78명이라는 수치도, 출산율이 떨어지는 속도도 모두 세계 기록이다. 불안이 극에 달한 나라, 애들이 줄어드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저출산·고령화 대책에 300조원 이상을 쏟아부었는데 아무 성과가 없는 것도 그만큼 ‘심리적 구멍’이 컸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대치동 학원 강사부터 여의도 정치인까지, 불안 마케팅으로 한몫 챙기는 부류만 속출했다.
불안은 성장의 동력이다. 그 힘으로 한강에다 기적을 일궜다. 지금은? 지나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불안이 커져서 성장을 잡아먹을 태세다. 동네 카페 사장님이 벽 한쪽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티베트 속담)’라고 써 붙여 놓을 정도로 모든 이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낀다. 배달민족 전체가 오늘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고, 내일에만 매달리기 때문은 아닐까?
2010년 개봉한 영화 ‘아저씨’. 적들을 소탕하러 가는 주인공 원빈이 심오한 대사를 날린다.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영화를 볼 때나 지금이나 알 듯 말 듯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만 생각하면 왠지 이 말이 겹쳐 떠오른다. 원빈의 경고처럼 이제는 조금 중심축을 옮길 때가 됐다. 우리 삶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을 덜어내야 한다. 또 다른 기적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안재석 한국경제TV 뉴스콘텐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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