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엽(61)은 이런 콩과 팥을 캔버스 위에 그리는 작가다. 그는 “콩은 움직이는 점이어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안료 묻은 붓을 캔버스에 찍고, 오일로 닦아내길 수십 번 반복한다. 문질러서 번지듯 그려내 입체감을 준다. 밝은 물감을 덧칠해 입체감을 주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이미 그린 것을 오일로 지워내면서 여백을 만들어 생동감을 준다. 그의 작품은 구상이자 추상이다. 작가는 콩과 팥을 한 알 한 알 구상화처럼 그리지만, 캔버스 전체를 바라보면 추상 또는 반추상 작품이 된다.
정 작가의 26번째 개인전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이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해 이중섭미술상 수상 이후 첫 개인전으로, 대표작인 팥과 콩 시리즈와 함께 ‘벌레’를 소재로 한 신작 등 모두 23점이 전시됐다.
정정엽의 콩과 팥은 때론 거대한 파도가 되고, 때론 별이 된다. 노란콩, 검은콩, 녹두, 완두, 붉은 팥 등을 다채롭게 그리는 그는 “콩류는 이 땅의 모든 빛과 색을 갖고 있다.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색이 아니라 먹어서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그런 색들”이라고 말한다.
정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콩과 팥 외에 벌레를 소재로 신작을 그렸다. 경기 안성시 미산리에서 만난 100여 마리의 벌레를 재현했다. 정 작가는 “벌레마다 기기묘묘하고 대체 불가한 신비로운 움직임이 있다”고 했다.
누가 만들었을지 모를 편견의 껍질을 벗은 벌레의 모습은 저주받은 미물이 아니라 신기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전시의 제목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은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2~3세기에 쓰인 여신의 신성에 대한 텍스트) 문서에서 가져왔다.
이 전시는 오랫동안 하찮게 여겨졌던 여성의 살림 노동과 이유 없이 혐오의 대상이 된 벌레에 대한 재발견이다. 심은록 미술평론가는 “정정엽의 작품에선 일관된 미학적 줄기가 체계적으로 발견된다”며 “생명의 고귀함과 숭고함을 드러내며 우리의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낸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8월 18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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