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빈의 배려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배려다. 문득 지리산 구례 땅에 자리 잡은 운조루의 주인장이 떠올랐다. 운조루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가 새겨진 쌀독이 있다. 집주인 류이주는 서른 가마가 넘는 쌀을 해마다 뒤주에 채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운조루의 미담은 그 때문이 아니다. 쌀을 가져가는 사람을 볼 수 없게 담장을 높이고 밥 짓는 연기가 밖에서 보이지 않게 굴뚝을 낮춘 때문이다. 이웃의 자존심을 먼저 생각한 속 깊은 주인의 배려였다. 이를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뒤주 속 쌀을 믿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양보했다. 운조루의 배려는 상대를 한 번 더 생각하는 배려다.
세상사 수만 가지의 배려가 있다. 돈줄을 쥔 기업의 배려는 어떨까. 많은 국내외 기업이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봉사한다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브랜드 액티비즘을 내세우고 있다. 구글은 구글 스트리트 뷰 서비스를 이용해서 광장공포증을 극복하고 사진가로 활동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전한다. 아마존은 아마존 배달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를 등장시켜 코로나19와 기후변화에 맞서는 자신들을 홍보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순수성이다. 대부분 자신의 비즈니스와 연관시킨 마케팅 목적의 활동이다. 자신의 미래에 도움 되는 아이템을 지렛대 삼아 들어가는 비용을 큰 이익으로 돌려받겠다는 계산이다. 이 시대의 정보와 소비를 주도하는 MZ세대가 공공성에 민감하니 그들의 환심도 사고 기업의 안위도 지켜 ‘가재도 잡고 도랑도 치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디지털 노마드는 재빠르고 영리해서 겉으로만 흉내 내는 기업의 포장술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 이해타산 없이 상대를 돕는 마음이 배려의 기본이라면 이제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도 궤도 수정이 필요하다.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이 있다. 미래를 위해 친환경 투자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곁엔 음지에서 고통받는 힘 없는 이웃이 여전히 많다. 가려져 있는 재소자 문제도 그중 하나다. ‘비바람 맞으며 나 홀로 견디기 어려워 소리내어 울었네/창해 일속의 미약한 존재라지만 다시 일어나야하리/슬픔을 겪은 자만이 강인한 인생의 참다운 길을 걸으리.’ 시인을 꿈꾸는 한 재소자가 참회의 마음으로 쓴 시다.
작년 10월 법무부 교정본부와 감사나눔연구원이 함께 재소자의 교화와 갱생을 돕는 ‘만델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루 다섯 번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시로 써서 발표하는 ‘오감사공모전’을 열고, 감사의 마음을 나누는 신문도 발행하고 있다. 이들은 여건만 허락된다면 프로젝트 범위를 넓히고 효과도 높일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이들의 활동을 도와줄 선의의 기업은 어디 없을까? 태어나는 아이들만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때의 실수로 격리됐다가 돌아오는 사람도 함께 살아야 할 엄연한 이웃이다. 그들의 안착과 정착도 우리 사회의 필연적 과제다. 배려의 참뜻을 살려 지금 당장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담장을 쌓고 굴뚝을 높여줄 기업의 진정성 어린 참여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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