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지고 찌그러진 못난이 달항아리…도예의 상식 깨뜨리는 예술여행자

입력 2023-07-06 18:18   수정 2023-07-07 02:53


둥그렇고 넉넉한 몸통, 순백색이 자아내는 고요함과 우아함…. 흔히들 ‘달항아리’라고 하면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열리고 있는 도예 전시는 이런 작품을 기대하고 들어오는 관람객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이곳엔 우리가 아는 달항아리는 없다. 가마에서 꺼내다 떨어뜨려 찌그러진 상태 그대로 전시장에 놓여 있는가 하면, 겉면이 형광빛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달항아리도 있다. 심지어 어떤 항아리는 얼음과 함께 물처럼 녹기도 한다.
‘세계적 거장’도 반한 예술여행자
모두 이헌정 작가(56)의 작품이다. 일반 대중에겐 생소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도예가다. 할리우드 톱스타 브래드 피트, 유명 골프선수 저스틴 토머스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헌정은 ‘예술가가 사랑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은 한국에 왔을 때 그를 콕 찝어서 ‘이 예술가의 작품이라면 뭐든지 좋으니 하나만 달라’고 했다.

이헌정은 ‘도예가’란 단어만으론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를 ‘여행자’라고 부른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여행자처럼 건축, 설치미술, 미디어아트 등 여러 가지 장르를 넘나들어서다. 콘크리트로 조각을 만들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연출부터 출연까지 도맡은 영상 작품을 찍기도 한다. 작업실도 한두 곳이 아니다. 미국, 한국, 유럽을 수시로 옮겨 다닌다.

“어떤 틀 안에 갇히는 게 지독히 싫었어요. 한국의 작업실을 도예가들이 모여 있는 경기 이천이나 여주가 아니라 양평에 둔 것도, ‘무슨 무슨 예술가협회’에 한 번도 가입한 적이 없는 것도 그래서죠. 심지어 몇 년 전 미국 비자를 신청할 때 직업과 소속을 적어내야 했는데, 협회에 들기가 너무 싫은 나머지 미국 방문을 아예 포기한 적도 있다니까요. 하하.”
자유를 갈망하는 도예의 도발과 파격
그렇게 어디 한 곳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여행’을 다니던 그가 이번 전시에선 도예로 ‘귀환’했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어 저니 투 리턴 홈(A Journey to Return Home)’으로 정했다. 하지만 여느 도예 전시와는 확연히 다르다. “후대 사람들이 이 시기를 돌이켜봤을 때 ‘아무 발전도 없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두렵다”는 그는 달항아리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부수기로 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귀환’(2023)이 그렇다. 소금 좌대 위에 놓인 달항아리는 죄다 갈라지고 찌그러져 있다. ‘달항아리의 미학은 완벽함에서 오는 게 아니라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온다’는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달항아리가 지닌 전통적 권위에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달항아리를 물에 담아 얼린 후 전시장 안에서 녹이면서 깨진 흔적을 남겨둔 ‘무제’(2023), ‘달항아리가 꼭 순백색이어야 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형광빛 달항아리 작품 ‘자연을 모방하다’(2023), 관람객이 스크린에 손가락을 대고 물레 작업을 하듯 원형을 반복해서 그리면 그 궤적을 따라서 디지털 이미지가 생성되는 ‘손끝에서’(2023) 등 도발적이고 신선한 작품이 가득하다. 오는 8월 20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가 끝나면 이헌정은 다시 ‘여행’을 떠난다. 포르투갈에 있는 9개 섬에 작품을 설치하는 장기 프로젝트 때문이다.

“50대 중반이 된 지금, 새삼 중요성을 느낀 게 있다면 ‘자유’예요. 작년보다 올해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 자유의 질량은 절대 퇴보하지 않는 것, 그래서 치열하고 도전적인 내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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