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은 두려운 존재다. 독을 품고 있는 종이 많고,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어디로든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함부로 다가갈 수 없어서일까. 뱀은 오랜 시간 신비로운 존재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런 뱀의 의미는 유럽 문화권에선 조금 다르다. 수천 년간 치유와 에너지, 생명과 지혜를 뜻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지팡이에도 뱀이 감겨 있다. 뱀은 늘 허물을 벗고 다시 새로워진다는 부활의 의미, 머리와 꼬리가 맞닿아 끝과 시작이 이어진다는 영원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뱀의 상징들을 화려한 주얼리로 탄생시킨 브랜드가 있다. 1884년 로마 시스티나 거리에 첫 점포를 낸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불가리다. 그리스 태생의 창업주 소티리오 불가리는 1948년 ‘뱀’이라는 뜻의 ‘세르펜티(Serpenti)’ 라인을 선보였다. 화려한 원석들과 금의 조화, 자연스럽게 스르륵 감기는 섬세한 세공과 역동적인 디자인은 다른 어떤 브랜드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성으로 단숨에 열풍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불가리만의 헤리티지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는 세르펜티가 세상에 나온 지 75년이 되는 해. 불가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특별한 전시를 마련했다. 뉴욕 밀라노 상하이 베이징 도쿄와 서울 등 6개 도시에서 전시가 이어진다. 서울 전시는 다른 도시들보다 더 특별하다.
지난달 23일부터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 전관에서 개막한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그 끝없는 이야기’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5인을 포함해 6명의 여성 작가 작품을 세르펜티의 헤리티지와 연결시켰다.
‘뱀의 화가’ 천경자의 희귀작인 ‘사군도’(1969)를 포함해 최욱경, 함경아, 홍승혜, 최재은의 작품이 전시됐다. 뱀을 모든 작품의 모티프로 썼던 프랑스 여성 작가 니키 드 생팔의 대표작 11점도 서울을 찾았다. 국제갤러리는 불가리에 갤러리 전관(3개 전시장)을 내주고, 전시 기획을 함께했다.
천 화백과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현대미술 작가 니키 드 생팔(1930~2002)의 작품은 그 색채와 조형미만으로도 눈을 사로잡는다. 이번 전시엔 11점의 조각과 회화, 드로잉을 선보였다. 생팔의 거의 모든 작품에 뱀이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이자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상징물이다. 남녀의 사랑을 동등한 시각으로 위트 있게 풀어낸 ‘아담과 이브’(1985), ‘생명의 나무(L’arbre de vie)’(1990) 등은 여러 각도에서 감상해보면 좋을 조각이다. 뱀 여러 마리의 머리를 겹쳐놓은 생명의 나무에서 흑백 영역에는 작가가 싫어하는 것(편협 비극 죽음 아픔)을, 컬러 영역에는 작가가 좋아하는 것(와인 태양 음악 등)을 새겨넣었다.
홍승혜(64)와 최재은(70)은 뱀의 모티프를 차용해 커미션 작품을 선보였다. 기하학 도형들을 조합하고 분해, 반복하는 홍 작가는 프랑스 시인 쥘 르나르가 1894년 발표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뱀(Le Serpent)’에서 영감을 받아 뱀의 형상을 표현했다. 세계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최재은은 황금뱀과 연꽃을 조합하고, 주운 나무에 황금을 칠하는 등의 표현으로 명상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총 3개 관의 국제갤러리 전시관을 아낌없이 사용한 이번 전시는 시작과 끝에 불가리 세르펜티의 헤리티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옛 여배우와 셀럽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보그 편집장을 지낸 전설의 패션 에디터 다이애나 브릴랜드(1903~1989)는 화이트 세르펜티 벨트를 목에 휘감고 있다. 평소 “여자라면 몸에 뱀 하나쯤은 지녀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엘리자베스 테일러, 지나 롤로브리지다 역시 평생 불가리의 뱀을 사랑한 배우였다.
불가리의 1960년대 광고 사진과 1950~1960년대 초기 세르펜티 제품들을 보는 즐거움도 크다.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세르펜티 컬렉션도 두 세트가 와 있다. 전시는 7월 31일까지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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