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이슈 찬반토론] '추가 규제만 58개'…정부가 개별기업 '총수' 직접 지정·규제해도 되나

입력 2023-07-10 10:00   수정 2023-07-10 15:47


한국에만 있는 유별난 대기업 규제가 있다. 매출, 자산, 이익, 직원 수 등 기업을 평가하는 여러 요소 중 자산을 기준으로 5조원, 10조원부터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해 여러 가지를 제한하는 제도, 이른바 재벌 규제다. 중소·중견기업이 성장해 자산총액 5조원이 되면 ‘공시대상기업집단’이 돼 67개 규제를 새로 적용받는다. 기존 규제까지 합치면 규제 수는 217개로 늘어난다. 자산 10조원을 넘겨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지정되면 계열사끼리 투자(출자)나 빚보증이 금지되는 등 58개 규제가 추가된다. 기업집단을 지정하면서 정부가 총수(동일인)도 특정한다. 윤석열 정부가 ‘그룹 회장’이 없는 개별 기업에 총수 지정 기준을 분명히 정하면서 기존 규제를 계속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섯 가지 기준을 새로 만든 공정거래위원회의 총수 지정 및 규제는 현대에 맞는 기업 정책인가.
[찬성] 실질적 기업 지배자에 경영책임 물어야…총수 기준 명문화, 진일보 공정 정책
요즘은 흔한 명칭이 아니지만, 한국의 기업집단에는 총수(그룹 회장)가 있었다. 기업 지분이 가장 많고 실질적으로 주된 경영권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회장직은 가족에게 주로 승계된다. 기업 경영 결과에 책임도 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권한만 행사하고 그에 따른 책임은 제대로 지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룹 회장이라며 공개적으로 총수 역할을 하면 책임을 묻기가 쉬웠다. 직책이 모호한데도 권한만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글로벌 대기업에서 사내 직책은 없으면서 인사와 투자 등 경영 전반에 걸쳐 전권을 행사하는 사례도 있다.

이번에 공정위가 확정 발표한 것은 대기업집단의 대표자로 ‘동일인(총수)’의 기준을 분명히 정했다는 것이다. 총수와 가족 및 주변 특수관계인들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배제, 사업 현황과 보유 지분 신고 공시 강화 등으로 기업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립하자는 차원이다. 그러자면 그룹 회장·총수 같은 직책을 분명히 하지 않는 대기업의 실질적 경영자에 대해서는 공정위가 자체 기준으로 정하고 규제할 수밖에 없다. 기준은 기업집단 최상단 회사의 최다 출자자, 최고 직위자, 경영에 대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 회사 내·외부적으로 대표자로 인식되는 자, 동일인 승계 방침에 따라 기업집단의 동일인으로 결정된 자 등 다섯 가지다. 기준은 정부가 정했지만, 국내 기업계(재계·경영계)가 관행적으로 해오던 것을 행정 법규로 명문화했을 뿐이다. 이 원칙에 따라 동일인, 즉 책임자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준을 명문화하면 제도의 불확실성이 개선되고 과거처럼 정부가 그때그때 임의로 총수를 지정하는 일이 없어진다. 그룹 회장 같은 직책을 가지지 않은 채 대기업의 경영 일체를 좌우하고 일감 몰아주기 같은 편익을 취하는 행위를 방치할 수는 없다. 공정거래법이 존재하는 한 정부는 이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반대] '동일인 강제 지정' 한국에만 있는 규제…글로벌 시대, 덩치 크다고 규제 더 하나
대기업집단의 경영 대표를 정부가 지정한다는 것부터가 시대에 뒤떨어진 관치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규제다. 오죽하면 한국에만 있는 대기업 규제여서 ‘한국형 갈라파고스 규제’라고 하겠나. 기업 덩치가 커졌다고 추가로 수십 개의 족쇄 규제를 채우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자산 10조원 이상이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지정돼 본격적으로 대기업 규제를 받는데, 규제 수준도 과도하다. 계열사 간 서로 여유자금으로 투자하는 행위(상호출자·순환출자), 빚(채무)보증 금지는 기본이다. 대상도 삼성·현대자동차·LG·SK 같은 대기업만이 아니라 네이버·셀트리온 같은 ‘신설 혁신 기업’도 포함됐다. 간판 대기업들은 해외 매출 비중이 80~90%에 달하는데 왜 국제적으로 통용되지도 않는 기준으로 국내에서 규제하고 간섭하나. 타당한 근거가 없다. 총수 지정제를 포함한 대기업집단 지정제는 37년 전 기업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막고, 소수에 경제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도입된 구시대 제도다. 그때는 기업 경영이 투명하지 못해 필요성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사이 경제 환경, 사회의 성숙도, 기업 여건이 모두 급변했다. 주요 영업이 해외에서 많이 일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총수를 비롯한 대주주 감시 및 견제 장치도 많이 다양해졌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 의결권 제한, 다중 대표소송 등이 모두 그런 것이다. 부당 지원 행위에 대한 감시도 한층 엄해졌다. 경제력 집중도 크게 완화됐다. 국내에서 대기업이라지만 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국제 기준으로 보면 ‘구멍가게’인 곳도 많다.

삼성은 애플과, 현대자동차는 도요타 테슬라 같은 해외 거대기업과 생사를 걸고 경쟁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 계열사 정보와 공시 누락 혐의로 고발당해 총수가 툭하면 조사받는 게 한국 현실이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무한의 국제 경쟁에서 이기나. 기업이 커졌다는 이유만으로 규제하는 구시대적 기업정책은 끝내야 한다.
√ 생각하기 - 100대 기업, 해외 매출 50% 이상…37년 된 '대기업집단 제도' 수명 다해
국내 10대 기업의 해외 매출 비중은 64%(2020년)에 달한다. 100대 기업으로 봐도 해외 비중은 50%가 넘는다(2022년). 그렇게 해외로 나아가는 데 한국에만 있는 규제가 기업 발목을 잡는다. 수십 년 낡은 규제를 쥐고 있으면서도 쿠팡 김범석 회장 같은 경우엔 이 기준을 적용할 수도 없다. 그가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김 회장을 이 규제로 묶으라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의 한국형 족쇄로 나라 밖에서 돈 버는 기업인을 규제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총수로 지정되면 먼 친인척의 사업 현황과 보유 지분까지 신고해야 한다. 이걸 누락하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1억5000만원 이하 벌금을 받을 수 있다. 총수로 지정되는 순간 새 규제를 받고, 형사처벌 대상도 된다. 오히려 혁신에 성공한 성장 기업을 뛰도록 지원해야 한다. ‘아버지-남편-아들’ 중심으로 국가가 법으로 공인했던 호주제가 폐지된 이유와 과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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