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문제를 해결할 때 개인의 불편은 쉽게 무시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불편의 손익을 계량화해 따지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불편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조직화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가 내세우는 대의나 명분을 우선하는 분위기도 한몫한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마스크 착용 의무화도 미국과 같은 여러 선진국에서는 개인 자유를 침해한다며 논란이 됐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이런 국민성을 정부가 역이용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보이스피싱 예방책이 대표적이다.
한 지인이 겪은 일도 어이가 없었다. 배우자에게 100만원을 송금받자마자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찾으려고 했는데 30분간 인출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정부가 보이스피싱을 예방하겠다고 시행한 ‘ATM 인출 지연제도’ 때문이었다. 그는 30분이 흐를 때까지 ATM 앞에서 멍하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은행 창구에서는 바로 출금이 가능하다는 얘기에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범죄가 100% 예방된다면야 감수할 불편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1만2816명이다. 전년보다 397명(3%) 줄어드는 데 그쳤다. 이를 두고 규제 효과가 있다고 말하기에는 궁색하다. 최근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감소하긴 했지만, 2019년까지 5만 명 넘게 급증했다. 피해자 수는 2012년 종합대책이 나오고 한참 뒤인 2020년에 와서야 대폭 감소로 돌아섰다. 피해자가 급감한 건 보이스피싱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거나 코로나19 확산 때문으로 추론하는 게 합리적이다.
보이스피싱이 날로 교묘해지는 건 사실이다. 최근에는 암호화폐나 간편송금 등을 통한 보이스피싱도 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보이스피싱을 서민 범죄로 규정하고 전쟁을 선포한다는 각오로 임해달라고 당부한 이유일 테다.
하지만 전 국민의 자유로운 금융 거래를 막는 방식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이 헌법적으로 인정받으려면 과잉 금지의 원칙(비례의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목적이 정당하고, 수단이 적절해야 하며, 국민의 기본권 침해가 최소로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법으로 보호해야 하는 공익과 침해되는 사익 역시 균형적이어야 한다. 범죄자조차 이 같은 과잉 금지의 원칙에 따라 저지른 범죄만큼만 처벌받는다. 하물며 국민은 규제로 인한 불편이 편익에 비례하는지 알 권리가 있다.
해외에서는 일반 국민의 금융 거래를 제한하는 식의 보이스피싱 예방책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홍성삼 가천대 경찰안보학과 교수의 2019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 주요국은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 교육과 홍보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만이 ATM 계좌이체와 현금인출 한도액을 줄였을 뿐이다.
애초 이런 규제는 금융당국의 행정지도에서 비롯됐다. 행정지도는 일정한 행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민에게 임의적인 협력을 요청하는 비권력적 사실행위를 말한다. 엄밀히 따지면 금융당국의 행정지도는 법적으로 금융회사가 따르지 않아도 되는 권고 사항이다. 하지만 소비자보다 금융당국의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는 은행들은 여전히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보이스피싱 엄단이 대통령 주문인 상황에서 금융당국의 명시적 지침이 없는 한 은행들이 자발적으로 소비자 불편을 해소하려고 할지 의문이다.
파킹통장을 개설하려던 저축은행에서 20일 감옥의 수감 기간이 끝났다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저축은행 앱을 열었다. 그새 금리가 연 3.2%로 떨어져 있었다. 1000만원을 1년 동안 맡기려고 했다면 이자 5만원을 밑진 셈이다. 시장 금리야 오르고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범죄 예방이라는 목적과 별개로 국민 전체를 불편하게 하는 규제는 최소한의 것이어야 한다. 지금의 소비자금융 규제는 당국의 명분과 편의에 치우친 하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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