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은 났는데 문제는 가격이었죠. 자칫 ‘오버페이’로 비치면 주주들의 성화도 만만치 않았을 테고요.”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인 폴리이미드(PI)필름 제조사 PI첨단소재(사진) 인수합병(M&A)을 검토했던 한 대기업 관계자의 얘기다. 이 관계자는 지난달 말 프랑스의 특수소재업체인 아케마가 PI첨단소재 인수를 발표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아케마는 바스프, 다우 등과 함께 세계 3대 화학사로 꼽힌다. 작년 상반기 PI첨단소재 매각이 본격화되자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베어링프라이빗에쿼티(PE)와 경합해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베어링이 PI첨단소재 지분 54%를 약 1조2000억원에 인수하는 주식매매계약(SPA)을 맺었다가 작년 12월 돌연 인수 의사를 철회하자 아케마는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 결국 새 주인이 됐다.
PI첨단소재가 올 들어 재매각 절차에 들어가자 다수 국내 기업도 회사를 들여다봤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매각 무산 후폭풍으로 PI첨단소재 주가는 베어링과의 계약 시점 대비 최대 절반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매각 측은 1조원 이상의 가격을 고수했다. 실사에 참여한 일부 국내 기업 임원은 시너지가 뚜렷하다고 느꼈지만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아케마의 PI첨단소재 인수 소식은 한국 화학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아케마가 공격적으로 펼치는 우주항공 분야에서 PI필름이 무궁무진하게 활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초고온·초저온 등 특수 상황에 강한 PI필름이 우주항공 소재에 본격적으로 접목되면 시장이 재편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에선 아시아 거점이 없던 아케마 입장에선 이번 PI첨단소재 인수가 꼭 필요한 M&A란 평가가 나온다. 가격이 아케마의 M&A 의사결정에 큰 걸림돌이 아니었던 배경이다.
국내 기업에도 의사가 전달됐지만 “800억원 수준인 회사를 4배 넘게 비싸게 사는 건 어렵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솔베이와 크로다 간 막판 경합 끝에 3500억원대 웃돈을 지급한 크로다가 최종 인수자로 낙점됐다.
자본의 국적을 따져 국내 기업의 해외 매각을 막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가 지정한 국가 핵심기술이 아닌 이상 해외 매각을 덮어놓고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낡은 프레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려되는 것은 유럽계 기업들이 주도하는 ‘현미경 M&A’의 파급력이다. 유럽 기업들은 M&A 건수가 많지 않지만 핵심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매물엔 재무제표와 무관하게 뭉칫돈을 던진다. 유동성이 넘치던 몇 년 전 한국 대기업들이 플랫폼 기업에 꽂혔을 때 이들 유럽계 기업은 기름때가 묻어 있는 한국 제조업 핵심기술을 차곡차곡 확보해 왔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한때 국내 산업계를 떨게 한 중국 기업의 ‘머니 게임’에서 한 단계 진화한 것이 유럽 기업들의 M&A 전략”이라며 “인수 시너지가 본격화되면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기업과의 경쟁력 격차가 더 커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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