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와 혁신은 주로 경계에서 탄생한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 설 때만 보이는 ‘어떤 것들’이 동력이다. 경계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흔한 것도 새로워진다. 우리가 그냥 지나친 것들은, 그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얻는다.
영국 런던에서 활동 중인 한국계 캐나다 작가 제이디 차(39·사진)는 할머니를 그렇게 봤다. 한국 신화에서 세상을 창조한 여신 ‘마고(麻姑)할미’로 세계 미술계를 발칵 뒤집은 게 벌써 수년 전이다. 그의 그림 속 할머니는 여우나 범고래 등과 결합해 다른 생물들을 품는다. 지혜 가득한 여신이 되기도 한다. ‘나약한 할머니’는 그의 그림에는 없다.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제이디 차의 개인전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가 열리고 있다.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혼종’의 정체성과 경계인의 아픔을 33점에 풀어냈다.
눈이 번쩍 뜨이는 초상화 형식의 회화들도 걸려 있다. 갈매기 머리에 인간 몸을 합치기도 하고(집), 백호와 머리칼이 긴 여성의 상반신을 묶기도 한다(유령과 안내자).
제이디 차는 캐나다의 에밀리 카 예술대를 졸업하고 런던 왕립예술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뉴욕현대미술관과 영국 내셔널갤러리, 베네치아 비엔날레 등에서 개인전과 퍼포먼스를 여는 등 ‘잘나가는 작가’로 살았지만, 그는 “평생 어느 한 곳에 온전하게 소속되지 않은 이방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이런 경험과 기억은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에 그런 작품들을 내걸었다. 한국 전통 설화 캐릭터와 소외된 존재를 이민 2세대의 눈으로 결합했다. 그렇게 작가는 도시의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동물들을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구미호(연작 ‘사기꾼, 잡종, 짐승’)에 빗댔다. 제이디 차는 “구미호는 통상 미인으로 변장해 사람을 꾀는 ‘사기꾼’으로 비유되지만 나는 수호자나 지혜가 넘치는 할머니로 재해석했다”고 했다. 그는 갈매기, 까마귀 등 부정적인 이미지의 동물에 신화적 상상력을 더해 지혜롭고 존중받는 존재로 바꿨다.
한국의 샤머니즘을 연상시키는 작품도 여럿 나왔다. 조각보의 프레임 안에 신선처럼 앉아 호랑이를 품은 ‘할머니 산’, 여러 마리의 여우가 커다란 보름달 안에서 포효하는 ‘깊은 꿈에 빠지다’ 등이 그렇다.
그는 “다른 문화권과 달리 한국 설화에서 할머니는 우주 만물을 지어낸 창조신(마고할미)이자 인간의 탄생(삼신할미)에도 관여하는 존재”라며 “전통 설화는 나에게 한국 할머니들이 권력과 지혜의 주체였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했다.
자전적 서사와 모티브도 작업 세계에 적극 활용한다. 그의 반려견은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복슬복슬한 털이 특징인 페키니즈 ‘피지’는 ‘구름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관람객들을 바라본다. ‘미래의 우리들’ 할머니는 깊은 주름이 사실적으로 묘사되며 뚜렷한 눈매와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그려진다. 작가 스스로가 원하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밝힌 ‘미래 할미’는 포근하고 정겨운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제이디 차는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가를 꿈꾸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우리가 갖고 있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라고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한국의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건 단지 K팝만이 아니라고, 우리만의 정체성을 알리기에 ‘옛날 것들’만큼 좋은 게 없다고 말이다. 전시는 10월 12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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