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천지가 분홍색으로 물든 바비랜드. 이곳은 오로지 바비 인형만을 위한 세계다. 대통령부터 의사, 판사, 기업가까지 전부 바비 인형의 몫이다. 반면 바비의 남자친구 켄은 ‘그냥 켄’이다. 바비가 바라봐주지 않으면 존재 의미가 없다. 그저 보기 좋게 가꾼 멋진 몸매만 유지하면 된다. 19일 개봉한 영화 ‘바비’(사진)의 무대가 된 판타지 세상의 모습이다.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들어도 당신 잘못이 아니다. 영화 자체가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다. 이전 작품들에서 다양한 여성의 삶을 그려온 그레타 거윅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그는 자신이 바라본 남성 중심적 현실과 정반대 모습인 ‘거울 세계’를 스크린에 옮겼다.
이야기는 마고 로비가 연기한 ‘전형적인 바비’의 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959년 마텔사가 처음 선보인 바비처럼 금발에 완벽한 몸매를 지닌 백인 미녀의 모습이다. 그는 바비의 천국인 바비랜드, 바비랜드와 대조적인 현실 세계, 현실 세계처럼 변해버린 바비랜드를 차례로 경험한다.
바비랜드에는 다양한 바비가 함께 살아간다. 인종과 체형은 제각각이다. 트랜스젠더 장애인 임신부 등 개성 넘치는 바비도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완벽하다. 자기를 바라봐주길 기다리는 켄을 뒤로한 채 밤마다 ‘여자들의 파티’에서 춤과 노래를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평온하던 일상은 어느 날 마고 바비가 인간처럼 변하며 틀어진다. 하이힐에 맞춰 까치발 형태였던 발이 평평해지고,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던 몸에 셀룰라이트가 붙는다. 이상 증세의 원인이 현실 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켄(라이언 고슬링 분)과 함께 현실로 떠난다. 그렇게 도착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모습에 마고 바비는 충격에 빠진다. 해변에서 만난 남성들은 끈적한 눈길을 건네며 희롱하기 바쁘고, 애써 찾아간 마텔사 경영진도 전부 남자뿐이다.
켄은 현실 세계에 빠져든다. 여기서는 자기가 주인공이 된 듯했다. 남성이 정·재계를 주름잡고, 근육질 몸매로 힘을 과시하는 모습에 환호한다. 바비랜드로 돌아간 그는 가부장제 사상을 전파한다. 마고 바비는 ‘켄덤’(켄+킹덤)으로 변해버린 고향을 원래대로 되돌리려 한다.
영화는 제법 심오한 메시지를 여럿 건넨다. 각양각색의 바비가 공존하는 바비랜드를 통해 다양성을 부각하고, 마고 바비가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만족하며 오늘에 충실한 삶’을 강조한다.
핵심 주제는 페미니즘, 즉 여성의 평등권 문제다. 그동안 여성 개인의 삶에 머무르던 감독의 시선이 사회로 확장했다. 감독은 전작 ‘레이디 버드’(2017)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소녀 이야기를 담았고, ‘작은 아씨들’(2019) 속 각자 다른 삶을 선택하는 네 자매를 통해 여성성의 범위를 넓혔다. ‘바비’는 현실과 대조적인 세계를 비추며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한층 끌어올렸다.
그런 면에서 마고 바비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켄이다. 바비랜드가 현실의 거울 이미지라면, 켄은 현실의 여성에 대응한다. 지난 세월 주류 바비들에게 밀려 소외된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가 켄덤을 세우며 소동을 벌여도 그 모습이 밉지 않다.
영화는 해피엔드를 거부했다. 바비와 켄이 평등한 바비랜드는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의 경험과 교훈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남성의 성별만 바꾼 불평등이 지속된다. 결말 부분에 켄이 ‘켄은 나다!’라고 외치며 나름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설정을 부여하지만, 여전히 ‘켄은 그냥 켄’이란 인상을 남긴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