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어느 대통령도 이렇게 세세한 비목까지 들여다보며 지출의 적정성과 형평성을 따진 적이 없다. 게다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날 대통령 발언의 정점은 올해 나랏빚을 늘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더불어민주당이 요구하는 30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 편성 요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올해 세입경정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세수가 모자라도 부채를 끌어와 결손분을 채우지 않겠다는 것. 이렇게 되면 모자란 세수만큼 지출을 줄이거나 다른 국고에서 돈을 끌어와야 한다. 올해 세수결손 전망치는 약 60조원. 전체 예산의 10%에 육박하는 큰돈이다. 추경호 부총리가 “강제 불용은 없다”고 하는 걸 보면 나름 복안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세출 삭감은 불가피하다.
용산 정무라인과 여당에선 걱정이 태산이다. 내년도 총선을 앞두고 재정을 풀어도 모자랄 판에 조이겠다고 하니 앞이 캄캄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성장률이 1%대를 헤매는 상황에서 경기부양형 추경을 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지난 5년간 빚이 빠르게 늘었을 뿐, 재정 건전성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원래 재정은 여력이 있을 때, 위기가 닥치기 전에 활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일단 수술대에 올라 빈사지경이 되면 링거도 소용없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선거에서 지더라도 미래 세대에 부담을 주는 빚을 늘릴 수 없다”고 대못을 박았다. 큰 선거를 앞두고 이렇게 긴축 재정을 하는 사례는 거의 보지 못했다. 코로나19 창궐에 편승한 문재인 정부가 지난 총선에서 엄청난 재정지출로 재미를 봤다는 점에 비춰볼 때 선거 전략으로는 빵점에 가깝다.
윤 대통령은 원칙을 세우면 참모들의 만류나 야당의 반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용산 이전, 노동개혁, 사교육과의 전쟁,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등이 그렇다. 여론이나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물러서는 것은 자신을 뽑아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막상 선거에서 지면 구조개혁 과제도 다 날아간다. 대통령이 완전히 선거에 초연한 것도 아닐 게다. 앙겔라 메르켈은 16년의 재임 기간 동안 독일 경제를 부흥시킨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빛나는 치적은 전임자인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강력한 재정개혁을 밑거름 삼았다는 평가가 많다. 슈뢰더는 수령액 30% 삭감이라는 초강수로 연금개혁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정권을 잃었다.
대통령은 많은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자리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이라도 누수를 차단하면서 요긴하게 쓸 수 있다. 일단 긴축을 결정했으면 그에 따른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경제 기초체력 확충과 취약계층 지원에 화력을 모으는 게 좋다. 전략산업과 첨단기술 투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고 미래 일자리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청년과 서민층에겐 물가를 자극하는 현금 살포가 아니라 교육과 자산 형성을 적극 지원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대학의 연구시설 확충이나 인공지능(AI) 무상교육 확대 같은 프로그램은 인적자본 확충과 사회적 후생 증가에 도움을 주면서도 물가에 중립적이다. 윤 대통령의 긴축 승부수가 경제와 정치 구조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단할 수 없다. 국회 차원의 재정준칙 마련이 기약 없는 상황에서 용기 있는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재정 포퓰리즘에 맞서는 정책은 인기가 없다. 당장 효과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개혁에 찬성하는 국민들조차 경제가 부진하면 지지를 거둔다. 하지만 고통을 감내한 긴축은 언젠가 보상을 받는다. 슈뢰더 개혁의 과실은 후임 메르켈과 독일 국민이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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