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탐욕이 부른 증권사 랩·신탁 사태

입력 2023-07-20 18:17   수정 2023-07-21 00:34

여의도에서도 채권형 랩·신탁은 생소한 상품이었다. 원래는 일종의 부가서비스에 가까웠다. 증권회사가 주요 고객 기업들에만 단기 자금을 운용해주는 서비스였다. 원금보장 상품은 아닌데 예금과 머니마켓펀드(MMF)보다 다소 높은 금리를 보장하는 암묵적인 혜택을 줬다. 이 과정에서 채권 파킹 거래, 만기 미스매치 같은 편법 운용이 있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금융감독원은 채권형 랩·신탁 불건전 영업 관행의 책임을 증권사 최고경영자(CEO)에게 묻고 있다. 편법 운용이 사태의 본질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번 사태는 저금리에 가려진 한국 증권업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형적 시장 뒤엔 성과급 잔치
단기 채권형 랩·신탁이 증권사들의 홀세일 전략 상품으로 변질한 건 2010년대 중반부터다. 한 중소형 증권사가 공격적으로 자금 유치에 나서자 다른 증권사도 속속 동참했다. 과당 경쟁은 불법 운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초저금리 시대에 더 높은 수익률을 찍어내기 위한 그들만의 채권 파킹 거래는 갈수록 대담해졌다. 증권사끼리 유동성이 저조한 단기채와 기업어음(CP)을 돌려 막아 수익률을 만들어내는 구조는 라임 펀드와 닮았다.

몇몇 증권사는 전체 자산의 2~3배 넘는 규모로 단기 운용자금을 늘려갔다. 단기 채권형 랩·신탁시장은 70조원 안팎으로 급팽창했다. 작년 레고랜드 사태가 터지자 속수무책이었다. 유동성이 막히자 저금리에 가려진 편법 운용은 멈춰섰다. 일부 중소형 증권사에선 사실상 지급 불능 사태가 터졌다. 기업들은 단기 자금을 회수하지 못해 발만 동동댔다. 대형 증권사들은 스스로 손실을 떠안고 기업들에 원금을 내줘야 했다. 금융당국은 금융위기로 번질까 봐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이번 사태에서 자유로운 증권사는 몇몇 없다. 채권형 랩·신탁시장이 기형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리스크 관리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편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기 수익만 추구한 결과다.
증권업 고속 성장의 이면
외환위기 이후 증권업만큼 지속 성장한 산업도 많지 않다. 전체 증권사 자산은 올 3월 말 기준 677조원(60개사)으로 20년 전 48조원(44개사)보다 14배 커졌다. 저금리 시절 성장은 수월했다. 자금을 싸게 조달해 고금리를 주는 곳에 쏟아부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해외 대체투자 프로젝트에 천문학적인 자금이 몰린 배경이다. 연 3% 수준에 조달해 연 7% 메자닌(중순위) 대출을 해주는 식이다. 그 뒤에선 성과급 잔치가 이어졌다. 랩·신탁 부서에서도 10억원 안팎의 연말 성과급을 받아 간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가는 혹독하다. 고금리 환경에서 국내 부동산 PF 연체율은 15%를 훌쩍 넘어섰고, 해외 대체투자 부실은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했다. 청구서가 언제까지 날아올지 모를 일이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조달 금리가 확 뛰면서다. 중소형 증권사들은 심각한 상황이다. 채권형 랩·신탁 규제로 단기채 시장이 쪼그라들면서 자금 조달은 더 어려워졌다. 연 7% 수준에 돈을 조달해선 굴릴 곳이 없다. 혁신 없이 천수답마냥 자기자본 장사에만 매달린 결과다.

한국 증권업은 그동안 한 번도 구조조정을 겪어본 적이 없다. 내년 총선이 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철저히 반성하고 혁신 경쟁력을 키워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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