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샤투 섬. 따사로운 햇살 아래, 한 화가가 능숙한 솜씨로 젊은 여성과 아이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저절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광경,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하지만 부드럽고 화사한 그림과 달리 화가의 마음은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오래 전 가난 때문에 곁을 떠나야 했던 연인과 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성공한 화가였더라면, 돈을 잘 벌었더라면. 그랬다면 그녀와 내 귀여운 딸도 지금 이들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 앞에 앉아있었을 텐데….’
그의 이름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르누아르는 11년 전 사귀던 연인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딸을 입양 보낸 뒤 연인을 떠나보냈습니다.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 후 르누아르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하지만 이런 괴로움은 르누아르가 평생 겪었던 고통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삶에는 수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르누아르는 집요할 정도로 행복한 그림만을 그렸고, ‘행복의 화가’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르누아르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왜 행복한 그림만 그렸던 걸까요. 오늘은 그의 삶과 작품을 깊숙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중년에 접어들 때까지, 르누아르는 내내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습니다. 가난한 하층민 집안에서 태어난 르누아르는 열두 살 때부터 공부를 그만두고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가혹한 일이었지만, 다행히 르누아르는 그림 그리는 걸 즐겼고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공장이 망한 뒤에도 르누아르는 그림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 스물한 살 때 미술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르누아르는 성실하고 실력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제시하는 ‘정답’대로 그리는 대신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 중 한 명이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너, 그냥 너 좋자고 그림을 그리는구나. 그렇지?” 가르쳐주는 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주의를 준 거였지요. “죄송하다. 앞으로 잘하겠다”는 느낌의 대답을 기대했을 텐데, 르누아르가 내놓은 답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당연하죠, 그림 그리는 게 즐겁지 않으면 왜 그림을 그리겠어요?”
그 학교엔 르누아르처럼 선생님 말씀을 안 듣고 자기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는 젊은이들이 몇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클로드 모네였지요. 이들은 곧 친구이자 동료가 됐고, 서로의 그림을 평가하고 토론하며 훗날 ‘인상파’라고 불리는 그룹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이었던 미술계는 이들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르누아르의 초상화는 한 평론가에게 “사람 피부를 그릴 때 녹색과 자주색을 쓰다니, 썩은 시체 같다”는 비난까지 들었습니다. 그림이 팔리지 않으니 이들은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밥을 굶는 건 일상이었고, 물감도 겨우 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즐거웠습니다. 르누아르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지요. “모네와 나는 매일 굶지만, 여전히 매우 즐겁다네.” 현실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불태우듯, 르누아르와 모네는 점점 더 밝은 색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비록 생활은 어려웠지만 마음씨 좋은 친구들 덕분에 르누아르는 종종 파티나 식사에 초대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스러운 여인들의 부드럽고 우아한 움직임, 아름다운 의복, 따뜻하게 빛나는 연인들의 눈동자, 함께 모인 친구들 사이로 이따금 흐르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 르누아르는 가끔 찾아오는 그 찬란한 순간들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소중하게 간직했고, 그림으로 옮겼습니다. 몸은 허름한 화실을 전전했지만 르누아르의 마음만큼은 결코 가난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젊은 연인들은 곧 인생의 무게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르누아르가 스물아홉 살이 되고 리즈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거든요. 르누아르는 여전히 비전도 없고 찢어지게 가난한 화가였습니다. 이대로 둘이 결혼해 아이를 키운다면 세 가족 모두 평생 가난에 허덕이게 되겠지요. 르누아르는 물론 당장 그림을 그만두고 품팔이라도 해야 할 것이고요.
그런데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아이는 입양을 보내고, 리즈는 르누아르를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거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이렇게 사생아를 낳고 입양 보낸 뒤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은 아주 흔했습니다. 결국 둘은 아이에게 어머니의 성을 따 잔 트레오라는 이름을 붙여준 뒤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을 보내기로 합니다. 그리고 둘은 헤어졌습니다.
몇 년 뒤, 리즈는 딸의 존재를 숨기고 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잔과 르누아르에게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르누아르도 마찬가지로 비밀을 지켰습니다. 다만 르누아르는 잔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했고, 남은 평생 잔과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용돈을 주고 신혼집을 마련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줬습니다. 훗날 잔이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슬픔에 빠졌을 때 르누아르는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네 편이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할게. 절대 절망하지 마.”
르누아르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마흔아홉 살이던 1890년입니다. 미국에서 르누아르의 그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런 인기가 프랑스로 ‘역수입’되면서 대박이 터진 덕분이었습니다. 이 해 르누아르는 알린과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다만 잔의 존재는 여전히 비밀이었습니다. 이미 10년 넘게 알린에게 잔의 존재를 숨긴 상황. 이제 와서 털어놓기도 늦었거니와, 알린의 성격상 사실을 말하면 르누아르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게 뻔했습니다. 르누아르는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으면 좋으련만. 가난과 교대라도 하듯 또다시 르누아르에게는 큰 불행이 닥쳤습니다.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찾아온 겁니다. 처음 제대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47세 때인 1888년. 병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화가의 몸을 갉아먹었습니다.
관절염이 진행되면서 르누아르의 손은 새 발톱처럼 휘었습니다. 거즈 붕대를 감지 않으면 손톱이 살에 파고들었습니다. 몸은 수시로 마비됐고, 체중은 44kg까지 빠졌습니다. 좋아하던 산책도 못 하게 됐습니다. 아예 걸을 수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도 모두 빠져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굳은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운 후 그림을 계속 그렸습니다. 놀라는 사람들에게 르누아르는 말했습니다. “대작을 그릴 수 없는 건 아쉽지만, 그림 그리는 데 손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네.”
그 긴 세월 동안 르누아르가 숨겨둔 딸과 몰래 편지를 주고받으며 돈을 보내줄 수 있었던 건, 첩보 드라마 뺨치는 보안 유지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딸에게 용돈을 송금했습니다. 그 주요 인물 중 하나는 르누아르의 집에서 10년 넘게 가정부 겸 간호사, 보모로 일했던 가브리엘이었습니다. 르누아르는 가브리엘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가브리엘도 르누아르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문제는 1913년 알린이 가브리엘의 책상에서 송금 서류를 발견하면서 벌어졌습니다. 송금 서류에 적힌 단서는 ‘트레오’라는 성(姓) 뿐. 하지만 알린은 즉시 직감적으로 모든 상황을 알아챘습니다. 만난 적은 없어도, 남편의 옛 연인 성이 트레오였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요. 가브리엘을 추궁해 사실을 알아낸 알린은 르누아르에게 가브리엘을 해고하라고 강력하게 압박했습니다.
가족을 성실하게 돌봐왔던 가브리엘을 하루아침에 해고하라고 강요한 건, 르누아르가 아끼고 의존하는 사람을 쫓아내서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이즈음 르누아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가브리엘의 해고로 인한 상실감과 슬픔을 잘 드러냅니다. “인생은 강물에 내던져진 코르크 조각과도 같지. 빙빙 돌다가 실려 가고, 튀어 오르고 잠겼다 떠오르기도 하다가, 잡초에 걸리면 벗어나 보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다가 사라지고 마니까 말이야. 가는 곳이 어디인지는 신만이 알겠지.”
이런 상황에서 1차대전에 참전한 장남 피에르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총알이 팔을 관통하는 바람에 팔을 못 쓰게 돼버렸습니다. 그도 모자라서, 둘째 장마저 전쟁터에서 허벅지 윗부분에 총을 맞았습니다. 장은 이 부상으로 평생 발을 절뚝이게 됩니다. 1915년에는 알린이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섬세한 터치는 불가능했지만, 여전히 조수 없이 스스로 붓을 놀렸습니다. 이 광경을 직접 본 이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네는 친구에게 “르누아르가 그토록 아픈데도 그림을 그린다는 건 정말 놀랍다. 영웅적인 그 행동이 경외심과 영감을 준다”고 했고요. 벨기에 화가 테오 반 리셀베르그는 “몸이 반쯤 썩은 이 화가가 아직도 뜨거운 열정을 품고 그림을 그리는 건 정말 감탄스러운 일이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에 대해 엄청난 존경심이 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르누아르는 그림 생각뿐이었습니다. 숨을 거두기 며칠 전 르누아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그림은 여전히 발전하고 있어.” 1919년 12월 3일 그림을 그리기 위해 꽃을 준비시키던 그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꽃….”
그의 78년 인생에는 곡절이 많았습니다. 특히 가난과 질병은 먹구름처럼 평생 그의 삶에 슬픔과 고통을 뿌렸습니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이 모든 아픔이 자신의 그림에 스며드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밥을 굶을 때도, 세상이 그의 작품에 돌을 던질 때도, 딸과 생이별했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거나 자신의 곁을 떠날 때도, 격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도 오직 행복만을 그렸습니다. 모든 순간 르누아르의 손이 붓을 건드릴 때마다 캔버스에는 어김없이 행복이 화사하게 피어났습니다.
그래서 르누아르의 작품은 행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가 평생 남긴 총 4000여점에 달하는 작품은 인간의 위대한 의지를 상징하는 일종의 기념비이기도 합니다. 운명이 주는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끈질긴 집념으로 행복을 캔버스에 담아낸, 한 인간의 승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르누아르가 최고의 인상파 화가 중 하나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i>*르누아르의 사후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숨겨둔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인의 뜻과 명예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를 비밀에 부치기로 했습니다. 르누아르의 아들 장이 1958년 출판한 아버지의 전기에도 이 사실은 빠져 있습니다. 르누아르가 리즈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는 사실은 2002년 한 편지가 발견되면서 뒤늦게 밝혀졌습니다.</i>
<i>*이번 기사의 상당 부분은 50년 넘게 르누아르의 삶을 연구한 르누아르 연구의 권위자 Barbara Ehrlich White의 'Renoir : An Intimate Biography'의 시각과 견해를 따랐습니다. 이 밖에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페터 파이스트 지음, 권영진 옮김, 마로니에북스, 타셴) '르누아르'(알렉산더 아우프 데어 에이데 외 지음, 김영선 옮김, 예경), '르누아르'(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지음, 최병진 옮김, 마로니에북스) '르누아르'(안 디스텔 지음, 송은경 옮김, 시공사)를 참조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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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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