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는 올해 5월 총 510쪽 정도 되는 두꺼운 ‘대기업집단 설명회’ 자료를 배포했다. 그중 핵심은 ‘대기업집단 공시 업무 매뉴얼’이다. 이 매뉴얼에 따라 공정위는 매해 공시점검을 하는데, 기업에 공시점검을 위한 방대한 자료를 요구한다. 계열사 간 거래뿐만 아니라 공시 대상이 아닌 비계열사 거래까지 작성해야 한다. 계열사 간 거래도 건별 또는 분기별 거래금액 10억원 이상 또는 자본금/자본총계 3% 이상 거래에 대해서는 상세 거래내역을 작성해야 한다. 건별 거래내역 작성 시에도 공시 내용에 없는 상세 거래조건 등을 작성토록 하고 있다. 계열사 간 거래는 거의 모두 건별로 상세히 거래 목적까지 제출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기업들은 이 공시점검 자료 작성에 계열사별로 다수의 인력을 투입하는데 한 달 이상 기간이 소요되는 실정이다. 82개 대기업그룹과 그 계열사 소속 합계 수천 명의 고급 인력이 이 일에 투입된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있을 오류 때문에 노심초사한다. 허위·부실 공시, 허위 자료 제출로 찍히면 과태료와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룹 총수도 예외가 아니다.
공정위는 매년 5월 기업들이 기업집단지정자료를 제출할 때 동일인 자필서명을 요구하는데, 지정자료 허위 제출 시 동일인의 인지(認知) 여부 및 중요도에 따라 고발할지 안 할지 결정한다. 그런데 올해 6월 공정위는 동일인, 친족 보유 해외 계열사 공시점검을 위한 점검자료를 요구하면서 동일인이 대표회사 등에 제출을 위임할 경우 위임장을 제출해야 하는데 이때 동일인의 자필 서명·인감 날인 및 인감증명서를 제출토록 했다. 업계가 동일인의 자필 서명 제외를 간곡히 요청하자 자필 서명은 이를 받을 수 없는 경우에는 제외할 수 있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 규제의 본질은 모두 동일인이라고 불리는 그룹 총수를 감시하는 데 있고, 어떻게든 동일인에게 책임을 지우려는 의도가 묻어난다. 하지만 대통령이 “업고 다니겠다”는 기업 총수를 꼭 이런 식으로 대접해야 하나.
공정위는 동일인인 자연인이 외국인이면 그 외국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고 그가 지배하는 회사를 동일인으로 지정한다. 이는 공정거래법령 위반에 대한 현실적 집행이 어려운 점, 자유무역협정에 근거한 최혜국 조항 위반 우려 때문이다. 회사를 동일인으로 지정할 경우 ‘동일인 관련자’의 범위에 속하는 4촌 이내 혈족과 3촌 이내 인척 관련 내용은 공시할 필요가 없어지고 기업의 공정위 관련 업무 및 동일인에 대한 형사처벌 가능성도 크게 줄어든다. 그러나 이처럼 외국인 자연인에 대한 동일인 미지정 관행은 내국인 동일인에게 심한 역차별이 된다. 참으로 구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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