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 고미술상가 2층은 이랜드가 태어난 곳이다. 한때 이랜드의 사옥이었던 이곳은 이제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의류 샘플을 보관하는 ‘보물창고’로 쓰인다. 이랜드는 1990년대부터 28만 점이 넘는 의류 샘플과 1만3000여 점의 전문 서적을 모아왔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이 정도 규모의 샘플을 보유한 기업은 이랜드가 유일하다.
디자이너들이 국내외 시장조사를 다니며 참고용으로 사 온 의류들이 쌓이고 쌓이자 이랜드는 이를 좀 더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2006년 서울 가산동에 샘플실을 처음 마련했다. 이후 공간이 더 필요해지자 2009년 1월 답십리 샘플실을 열었다. 샘플들은 보통 답십리에 보관되는데, 다가오는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참고할 만한 샘플들은 가산동 이랜드 본사와 패션연구소가 있는 샘플실로 옮겨진다.
수십만 벌의 옷으로 가득 찬 답십리 샘플실에 발을 들여놓으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압감이 느껴진다. 이 샘플실은 고미술상가의 한 층을 통으로 사용한다. 2640㎡ 규모다. 샘플실에는 옷이 빽빽이 걸린 2층짜리 행거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마치 옷으로 된 숲 같다.
옷은 물론 가방, 넥타이 등 액세서리까지 몸에 걸칠 수 있는 건 전부 다 있는 듯했다. 미국 고등학교 치어리더들이 입던 유니폼부터 명품 브랜드의 코트, 세계 각지의 전통의상을 비롯해 실제 전쟁에서 입었던 군복까지 걸려 있다.
양이 엄청나다 보니 이를 분류하는 일도 만만찮다. 이랜드는 답십리 샘플실을 방문한 디자이너들이 효율적으로 의류 샘플을 찾을 방법을 고민했다. 도서관 분류법을 참고해 의류를 100여 가지 유형으로 세분화했다.
수천 벌의 스트라이프(줄무늬) 패턴의 옷은 세로·우븐세로·부분·멀티·1도가로 등 줄무늬 모양에 따라 10여 개 유형으로 분류했다. 넥타이도 마린·바로크·체크 등 30여 개 종류로 나눠 정리했다. 기본적으로 수십 년 된 옷들이다 보니 관리에도 많은 신경을 쓴다. 특히 중요한 건 방충이다. 모직 옷의 경우 좀이 슬기 쉽기 때문이다. 형광등 불빛에 옷의 어깨 부분이 바랠까 봐 평소에는 불도 꺼놓는다.
수 년 전 프라다의 전 수석디자이너가 이곳을 방문해 “세상의 모든 체크는 이곳에 다 있다”고 감탄하며 연신 “언빌리버블(unbelievable)”을 외쳤다는 얘기는 패션계에서도 회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랜드가 보유한 체크 패턴의 옷만 8000개가 넘는다. 이랜드 소속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답십리 샘플실이 보물창고로 불린다. 샘플실 구석에 걸려 있는 수십 년 전 옷의 그래픽, 패턴, 소재, 형태에서 번뜩이는 영감을 얻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이랜드의 브랜드 ‘후아유’ 제품 중 레트로(복고) 열풍 덕에 히트한 바시티재킷(야구점퍼)이 대표적이다. 이랜드는 1980년대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학생들이 실제로 입었던 바시티재킷을 학교별로 갖추고 있다. 샘플실에서 잠들어 있던 이 옷들의 소재와 패턴을 참고해 ‘그때 그 느낌’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었다고.
이랜드 소속의 한 디자이너는 “트렌드는 빈티지에서 시작하고, 시대에 따라 돌고 돌기 때문에 예전 의류를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며 “답십리 샘플실을 자주 방문해 소재와 패턴에 대한 영감을 얻는 편인데, 여기에 현대의 실루엣을 추가해 디자인하면 트렌드를 선도하는 상품이 창조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답십리와 가산동에 흩어져 있는 샘플들은 내년에 마곡 연구개발(R&D)센터가 문을 열면 이곳으로 모두 모일 예정이다. 이랜드는 임직원뿐 아니라 패션 전공자와 업계 관계자 등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샘플실을 찾아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아카이브의 일부를 공개할 계획이다.
양지윤 기자 y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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